‘1949’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역사
금호동은 이제 서울의 중심으로 이해된다. 서울이 한강을 큰 갈래로 해 강북과 강남, 동서로 커지면서 지형적으로 금호동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강남이 경기도 광주군·양주군 등에 속해 있을 때 최남단은 용산이었다. 그중에서도 한남동과 옥수동, 금호동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서울의 남쪽을 이루었다. 금호동은 특히 한강북단의 커다란 구릉지대로, 강을 굽어보는 지대에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고산자 김정호의 한양 지도를 봐도 제일 남쪽은 역시 이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금호동, 이제는 한남동에서 이어지는 독서당로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이 동네는 서울의 한 영역으로 회자되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토박이 정서가 많이 사라졌지만, 금호동은 한때 이곳에 살던 많은 이의 고향이었다. 엄청난 히트를 쳤던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열연해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한석규 씨도 이 동네에서 자랐는데, 그때의 생활 경험이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금호동은 달동네도 있었고, 피란민을 비롯한 서민이 특히 많이 살아서 생생한 삶 의 현장을 매일 보여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시장 출입구에 ‘1949 금남시장’이라는 간판을 크게 붙여놓았는데, 이 숫자가 상징하는 것이 동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토박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전통시장
금남시장은 그 동네에 살던 수많은 시민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전통시장이다. 서울의 대형 시장들이 서울시민은 물론, 물건을 구하려는 지방민들까지 몰려드는 특화된 도매시장의 몫을 많이 한 것과 달리 금남시장은 지역 시장으로 이 근동 시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는 교통이 좋아졌지만, 금호동 일대는 고립된 독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남시장은 오랜 기간 토박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비 시장이었다.
그런 형태의 소비 시장답게 금남시장은 아기자기한 물목을 고루 다루는데, 과거에는 포목과 피복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물건을 팔았지만 점차 음식과 식재료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젊은 외지인이 시장에 진입해 기존에 자리 잡은 음식점과 함께 맛있는 시장으로 그 역할을 바꾸고 있다. 특히 지하철망이 확충되면서 외부에서 접근이 쉬워지고, 새로운 음식 문화를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시장의 풍모가 새로워지고 있다.
금호동의 산 역사, 골목 냉면
금남시장의 터줏대감이라면 ‘골목냉면’을 들 수 있다. 1966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금호동의 산 역사로 남아 있는 곳이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날씨가 더워지면 골목냉면을 한 그릇 먹어야 여름을 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싸고 맛있고 푸짐한, 전형적인 동네 시장 냉면집이다. 요새는 다른 지역에서 오는 손님이 많다. 찌는 여름에 입안이 얼얼하도록 차가운 육수를 들이켰다. 옛날 냉면 맛이 오롯이 살아 있다. 대표 이규호 씨는 가게를 창업한 어머님의 뒤를 잇고 있는데, 마침 시장 형성기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시장 골목골목이 넓어졌는데, 백범주택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과연 시장의 핏줄처럼 이어지는 작은 골목이 보이고, 여전히 토박이들이 산다. 손수레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골목도 있다. 백범주택이란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 일대에 학원을 짓고 ‘백범학원’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한다. 이후 적산 주택이 남아 있는 동네에 집을 지어 희사하면서 생겨난 말로, 보통 김구주택이라고도 부른다.
금남시장의 ‘힙’ 한 명물 식당들
금남시장의 변화는 젊은 요리사와 가게 사장들이 이곳에 입주하면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실내 포차 자리였는데, 비어 있었어요. 적은 돈으로 제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최적이었지요.”
미국에서 요리를 하다가 귀국해 금남시장 한 귀퉁이에 주점을 열어 한식과 서양식을 접목한 음식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금남정’이다. 청어알 두부쌈·제주 은갈치속젓 파스타 같은 특별한 요리를 선보이며, 특히 전통주로 채운 술 리스트가 아주 좋다. 주방을 혼자 꾸려가고 있지만, 일이 재밌어서 힘든 줄 모른다는 셰프의 가게다. 이곳은 금남시장이 ‘힙’해지는 데 큰 몫을 했다.
‘소설옥’도 그런 가게다. 이베리코 돼지와 아이디어 넘치는 요리를 함께 구성해 돼지고기 구잇집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큰 외식 아이템은 역시 돼지고기 구잇집인데, 10여 년 전부터 시내 곳곳에 창의적 방식으로 바꾼 젊은 고깃집이 들어서고 있다. 이 집도 그런 큰 물결에서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금남시장의 신구 조화에 빠질 수 없는 집이다. 이 집을 비롯해 다채롭고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선 금남시장길을 흔히 ‘금리단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한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이 밖에도 구수한 콩비지찌개를 아주 맛있게 끓이는 ‘콩나라3000냥’도 금남시장의 명물이다. 더위가 가시는 저녁에는 편한 차림으로 천천 히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운치를 만끽해보기 바란다.
맛의 제왕 금남시장 맛집
트렌드를 품은 돼지고기 식당 ‘소설옥’
‘혀를 즐겁게 하는 집’이라는 뜻의 ‘소설옥(笑舌屋)’은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고기를 참숯에 구워 맛의 깊이가 남다른데, 여기에 다양하게 준비한 와인을 함께 마시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금남시장 주변에 여러 식당이 생겨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 맛집으로 꼽힌다.
가격 이베리코 모둠(550g) 5만7,000원 / 본삼겹살(220g) 1만9,000원 / 화육볶음밥 1만4,000원
맛과 분위기 모두 넘치는 매력 ‘금남정’
금남시장에 위치한 우리 술 주점. 독특한 외관과 아늑한 조명 빛이 감싸는 내부가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직접 선별한 전통주와 이색적인 음식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적.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진심이 음식과 공간 모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격 청어알 두부쌈 1만4,000원 / 마라두부 1만6,000원 / 제주 은갈치속젓 파스타 1만7,000원
진정한 노포 맛집 ‘골목냉면’
1966년에 문을 연 금남시장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냉면집. ‘서울식 냉면’으로 새콤달콤하면서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정성이 냉면에 한가득 담겨 있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오직 한자리에서 대를 잇고 있어 이 냉면을 맛보기 위해서는 금남시장에 와야만 한다. 그 어디에도 똑같은 맛은 없다.
가격 물·비빔냉면 9,000원 / 매운 물·비빔냉면 9,000원 / 1인 만두 세트(물·비빔냉면+만두 3알) 1만2,000원
주머니 가볍게 든든한 식사 ‘콩나라3000냥’
시장 상인들과 동네 주민에게는 이미 맛집으로 소문난 이곳은 저렴하지만 든든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다. 일석이조를 넘어 맛까지 있으니 가히 일석삼조인 셈이다. 특히 대표 메뉴인 콩비지찌개는 삼삼하면서도 담백해 자꾸만 손이 간다. 낮에는 식사로, 밤에는 안주로 여러 메뉴가 마련돼 있어 언제 찾아도 좋다.
가격 양념두부 5,000원 / 콩비지찌개 7,000원 / 홍어애탕 1만2,000원
글 박찬일 취재 조서현 사진 김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