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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들

격동의 현장,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들>
2023.02

에세이

자연이 품은 서울

격동의 현장,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들

나라를 더 잘 지키기 위해 심은 나무에서 권력의 행태까지

서울에는 나무가 많다. 나무보다 높이 솟아오른 건축물의 그늘에 가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을 뿐, 여느 농촌 산촌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거리마다 가득한 가로수를 비롯해 건축물의 조경을 위해 심어 키우는 나무들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면, 그 총합이 예상보다 많은 것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사정이다.

서울의 나무에 담긴 의미는 여느 지역 나무에 비해 훨씬 크다. 이 땅의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서울의 나무들은 들고 나는 사람살이를 온전히 바라보며 수굿이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이 떠나도 나무는 남아서 사람의 향기와 자취를 오래오래 기억한다. 서울의 나무는 서울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나무를 단지 생물학적인 의미로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의미로 바라볼 대상이라는 이야기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풍수지리의 자취, 잠실 뽕나무

서울의 오래된 나무 가운데에는 수명을 다한 뒤에도 문화재로 보호받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 시대 초기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다. 그때 서울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 키웠다. 농경문화 시대에 재산의 척도는 ‘비단’이었고, 비단을 자아내려면 누에를 키워야 하는데, 누에를 살지게 먹여 키우려면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돋우는 ‘뽕나무’를 많이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풍수지리에 관련한 이야기다. 한강 변에 ‘절두산’이라고 부르는 절벽이 있는데, 그 형상이마치 누에의 머리를 닮아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른다. 서울의 관문에 버티고 선 누에 형상의 절벽 때문에 서울의 기(氣)를 살리려면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게 풍수지리의 풀이였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전국에 산재해 누에를 키우는 ‘잠실’을 서울에 모았을 뿐 아니라, 궁궐을 비롯한 서울 전 지역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독려했다. 조선의 도읍 한양은 그렇게 뽕나무가 무성했다. 특히 잠실은 그 모든 뽕나무의 중심지가 됐다.

세월이 흐르며 잠실을 비롯한 서울의 뽕나무는 모두 사라졌다. 그 많던 뽕나무 가운데 단 한 그루만 남았다. 바로 지금의 잠원동 아파트 단지 안에 남은 나무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던 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 초기 한양의 역사를 증거하는 이 나무는 진작에 말라 죽고 말았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천연기념물을 새로 지정한 1962년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서울의 역사를 증거하는 중요한 흔적이라는 의미에서 1973년에 이 나무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고는 죽은 뽕나무 곁에 한 그루의 어린 뽕나무를 심어 키워 옛 영화를 재현하고자 했다. 고사한 생명체가 문화재에서 해제되지 않은 유일한 사례가 될 것이다.

새로 심어 키운 뽕나무에서 맺은 열매, 오디

예전의 뽕나무는 죽었지만, 그 곁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후계목이 수굿이 서울의 역사를 증거한다.

조선시대 왕실 권력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나무,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

조선 후기 왕실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도 있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한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가 그 나무다.

석파정(石坡亭)은 원래 조선 철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서(別墅)였다. 김흥근은 이곳에 별서를 짓고 그 이름을 ‘삼계동정사 (三溪洞精舍)’라고 했다. 이 별서를 탐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종 집권 직전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이었다. 이하응은 삼계동정사를 자신에게 팔라고 여러 차례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하응은 나중에 임금이 된 고종과 함께 이 별서에 찾아와 하루 묵었다. 임금이 묵은 집에 그 신하가 살 수 없다는 당시의 예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결국 아름다운 풍광을 갖춘 김흥근의 별서는 이하응이 물려받게 됐다.

이하응은 주변이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해서 삼계동정사였던 이 별서의 이름을 ‘석파정’으로 고치고 자신의 호까지 ‘석파’로 바꾸었다. 이하응이 죽은 뒤에 소유권이 몇 차례 바뀌어 2006년에 의약품유통업체인 ‘유니온약품그룹’의 회장이 최종 소유자로 확정됐다. 그는 석파정 입구에 사설 미술관을 세우고 석파정을 함께 관리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미술관을 통해 진입해 관람할 수 있는 석파정 소나무는 높이 6.2m, 가슴높이 줄기둘레 3.3m인 소나무로, 여느 소나무에 비해 큰 나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수려한 데다 조선 후기 권력자들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나무다. 이 소나무에는 ‘천세송(千歲松)’이라는 별칭도 있다. 실제 나무 나이는 200년쯤 됐지만, 나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천년을 산 나무’인 것처럼 붙인 별칭이다. 사방으로 18m 넘게 펼친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모든 나뭇가지가 용틀임하듯 근사하게 솟아오른 명품 소나무다.

나무 나이는 2백 년쯤 됐지만 굵은 줄기가 늠름하게 자라난 서울 부암동 석파정 소나무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조선을 더 좋은 나라로 지키기 위해 애면글면하며 심어 키우던 뽕나무, 그리고 민간의 별서를 권력을 이용해 빼앗은 조선 후기 왕실의 행태를 보여주는 소나무. 역사 교과서에 담기지 않은 우리 역사의 뒤안에 담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특별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한번 뿌리 내린 자리에서 죽는 순간까지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살아가는 건 나무의 운명이다. 그 운명 때문에 제 편의에 따라 무시로 들고나는 사람살이의 자취를 모두 바라본 나무는 사람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사람살이의 향기를 기억한다.

다만 나무는 자신의 몸통에 담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사람의 언어로 들려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 땅에 살아가는 나무를 더 오래 바라보고, 그의 속살 깊은 곳에 담긴 생명의 흔적을 샅샅이 톺아보아야 할 이유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서울 지역에 살아 있는 모든 나무들을 더 정성되이 더 오래 보존하는 건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을 바로 지키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응이 고종의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차지한 별서 석파정 앞에 서있는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


서울이 간직한 자연을 통해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본다. ‘서울의 오래된 나무’를 시작으로 ‘서울의 궁에 있는 나무’, ‘서울의 가로수’를 연재한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이자 천리포수목원 이사, 대학교수이다. 전국 각지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나무와 관련된 칼럼 연재, 방송, 강연 등을 하고 있다.
<나뭇잎 수업>, <도시의 나무 친구들>을 펴냈다.

글·사진 고규홍 일러스트 장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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