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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있는 서울

역사가 있는 서울>
2023.01

문화

서울 옛 이름

역사가 있는 서울

음성·문자 지원

글로벌 도시로 성장한 서울에는 무구한 역사를 가진 동네가 많다.
오랜 이야기를 품어온 서울의 동네로 역사 여행을 떠났다.

답십리동 - 동대문구

답십리동 - 동대문구

답십리동은 동쪽은 장안동, 서쪽은 마장동·제기동, 남쪽은 용답동·군자동, 북쪽은 전농동·청량리동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이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踏十里)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 <여지대전도>에도 답십리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농업이 주업이었으며, 중랑천 하류에서는 미나리와 채소를 많이 재배했다. 답십리1동과 통합된 옛 답십리5동은 답십리 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한 곳이라 하여 원마을이라고 부르며, 답십리1동 지역인 너머마을은 원마을에서 산을 넘어 다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답십리2동 지역의 자연 마을인 중산에는 집이 없다가 1960년 이후부터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이야기 하나 더

답십리는 고미술 상점으로도 유명하다. 고서화, 고가구, 도자기 같은 고미술품과 독특하고 다양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밀집한 곳이다. 서울 일대에 흩어져 있던 고미술 상점이 1980년대 중반부터 답십리 일대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현재 140여 개 점포가 거리를 이루고 있다.

당주동 - 종로구

답십리동은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밟은 땅이다.

당주동 - 종로구

당인동 - 마포구

당주동은 남쪽은 신문로(新門路)1가, 북쪽은 내수동(內需洞), 서쪽은 신문로2가, 동쪽은 도렴동(都染洞)과 접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상시동, 내섬동, 창례동, 북문동, 대창동, 훈조동, 야주현, 당피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해 당주동(唐珠洞)이 되었다. 당주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지명인 당피동(唐皮洞)의 ‘당(唐)’ 자와 야주현(夜珠峴)의 ‘주(珠)’ 자를 합성한 것에서 유래한다. 당피동은 중구 명동1가에 있던 마을로, 조선 시대에 이곳에 온갖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이 가게에서 물건을 당화피(唐樺皮)로 싸주어 당피골·당핏골이라 한 데서 시작되었다. 야주현은 신문로1가에 걸쳐 있던 고개인 야주개에서 따온 지명이다.

+ 이야기 하나 더

당주동은 광화문역 인근 세종문화회관 뒤쪽 일부 지역이다. 이곳에는 훈민정음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주시경 선생을 기리는 주시경 마당이 있다. 주시경 선생의 정신이 깃든 글귀와 상징 조형물을 만나볼 수 있고, 거리 곳곳에 숨겨진 한글 조각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감과 과실을 파는 가게와 고개 이름에서 지명을 따온 당주동.

당인동 - 마포구

당인동(唐人洞)은 조선 시대 당인리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래 댕말·댕기마을·당인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당(唐)은 중국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 사람이 거주하던 마을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병사 한 사람이 조선인 처녀에게 반해 전쟁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내내 그 처녀 곁에 머물면서 청혼했으나, 처녀는 외국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얼마 후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남편이 일찍 죽자 명나라 병사는 그 여자와 결혼했고, 그들의 후손이 이곳에 살았다고 전한다. 당인리, 다인동이라고도 한다.

+ 이야기 하나 더

당인동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력발전소가 있다. 1930년 일제강점기에 세워져 1969년 이전까지 당인리발전소라고 불렀다. 현재는 지상부에 있던 석탄 화력발전 시설은 가동하지 않고, 지하에 새로 건설한 LNG 발전 설비만 운영한다. 그 위에 ‘마포새빛문화숲’공원을 조성했다.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위치한 당인동.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위치한 당인동.

류창희 일러스트 김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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