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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 있는 서울

전통이 살아 있는 서울>
2022.09

문화

서울 옛 이름

전통이 살아 있는 서울

서울에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동네가 많다.
조선 시대 관청에서 유래한 동 이름을 가진 서울의 동네로 떠나봤다.

계동 - 종로구

계동은 조선 초기 제생원이 있던 자리라 제생동이라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와 ‘계’의 발음이 혼동되어 계생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계생동은 조선 시대에 널리 쓰이다 일제강점기에 계생동이 기생동과 발음이 비슷해 주민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생’ 자를 뺀 계동으로 불렀다. 계동의 유래가 된 제생원은 조선 초기에 서민의 치료와 미아의 보호를 맡은 의료 및 구호 기관이었다. 제생원의 주요한 업무는 서민을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는 일도 맡았다. 질병을 앓아도 너무 가난해 치료하지 못하는 빈민이나 행려병자 등을 치료했다.

+ 이야기 하나 더

‘제생원터’ 표지석은 종로구 계동 현대 본사 앞에 위치해 있다. 근처 서소문동에는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 형 이재원이 살던 집터인 ‘계동궁터’ 표지석도 있다. 계동궁 근처에 제생원과 승문원이 있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고종이 잠시 피신해 있기도 했다. 또한 천문·지리·역수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상감터’와 궁중의 미곡·장 등을 관리한 관청인 ‘사도시터’ 역시 계동에 있다.

공평동 - 종로구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의금부. 의금부는 조선 시대 사법기관으로 금오(金吾)·왕부(王府)·조옥(詔獄)이라고도 한다. 공평동이란 이름은 의금부에서 재판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북쪽엔 견지동, 동쪽엔 인사동, 남쪽에는 서린동과 관철동, 서쪽에는 청진동이 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괴동·전동·금부후동·발리동·이문동 등이 통합되어 공평동이 되었으며, 1936년 4월 공평정에서 1946년 종로구 공평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공평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 동 관할 아래 있다. 과거 의금부가 있던 자리에 종로경찰서가 들어섰다가 현재는 SC제일은행 본점이 위치한다.

+ 이야기 하나 더

1987년에 설치된 ‘의금부터’ 표지석은 종각역 1번 출구 근처 SC제일은행 본점 내 화단에 있다. 1404년 태종은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했다. 하지만 힘없는 백성이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종 때 한 노비가 신문고를 치지 못한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광화문의 종을 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신문고의 접근을 어렵게 만든 의금부 관리가 파면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내수동 - 종로구

내수동은 조선 시대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자리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내수삿골·내수사동 혹은 줄여서 내수동·내수사라고도 불렀다. 내수사는 호조나 탁지부에서 공급하지 않는, 궁내에서 쓰는 미곡·포백·잡물과 노비 등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 관청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곳이기에 전수부터 전화까지의 관직은 모두 내관이 겸하도록 했다. 1914년 경성부 수창동, 1936년 경성부 내수정, 1943년 종로구 내수정에서 1946년 종로구 내수동으로 변경되었다. 내수동에는 ‘내수사터’ 표지석이 있다. 광화문 서울지방경찰청 맞은편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앞 인도 변에 위치한다.

+ 이야기 하나 더

내수사는 조선 시대 왕실 재정을 관리하던 관서로, 조선 개국 초에는 고려 왕실로부터 물려받은 왕실 재산과 함경도 함흥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 가문의 사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다. 1801년(순조 1) 한때 내수사의 노비 원부를 불태워 내수사 노비를 혁파한 일도 있으나, 내수사는 폐지되지 않다가 고종 때 이르러서야 혁파되었다. 내수사는 공적 기구 성격을 띠기보다는 왕실 사장(私藏)으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류창희 일러스트 김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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