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끼니 대용 일등 안주
서울엔 유명한 음식 골목이 많지만, 역사성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장충동 족발골목이다. 지금은 도시 가로가 정비되고, 가게 수도 줄어든 데다 새로 건물을 단장해서 ‘골목’ 느낌이 덜하지만, 월드컵이 열리던 무렵까지만 해도 왁자한 뒷골목 느낌이 있었다. 장충동은 배후에 넓은 주거지를 끼고 있으며, 동대문·강남·충무로를 연결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교통 요지이거나 오피스 밀집 지역이 아니어서 음식 골목이 들어설 조건은 아니었다.
“원래는 대폿잔 기울이는 동네 사람이 많았지요. 나중에 유명해지면서 인근 회사원들, 멀리서 오는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뤘습니다. 골목에선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다녔어요.”
‘뚱뚱이할머니집’의 2대 사장인 김제연 씨의 증언이다. 그는 아내 김명숙 씨와 지금의 간판명이 된 어머니 전숙열 여사와 함께 이 가게를 운영했고, 이제는 3대인 손녀 김송현 씨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 골목에서만 한때 10개가 넘는 족발집이 성업할 정도였다. 현재는 많이 줄어서 장충동엔 6개 가게가 영업 중이다. 족발로 유명해지다 보니 원조 논쟁이 격한 곳이기도 하다. 그중 뚱뚱이할머니집, 평안도할머니집이 자주 입길에 오른다. 이 두 집은 한때 원조 격인 할머니들이 한 가게에서 같이 일한 역사가 있다.
이북 어머니의 손맛을 재현하다
장충동 족발집의 탄생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대폿집이었다. 이북에서 온 아주머니들이 생존하기 위해 철판 놓고 빈대떡을 부쳐 판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뚱뚱이할머니집은 당시 메뉴가 남아 있다. 넉넉한 덩치와 인심으로 뚱뚱이 할머니로 불리던 故 전숙열 할머니는 해방 전에 월남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서울과 한국의 전설이 된 족발은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다고 한다.
“저희 어머니(전숙열 여사)께서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던 돼지족을 기억해서 요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맛을 찾아서 간장 넣고 파, 양파 넣고 해서 족이 나온 거죠. 오 향장육하고는 달라요. 한약재 같은 건 넣지 않으니까요.”
돼지고기는 귀한 음식이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연히 모든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다. 이북에는 돼지족 요리가 유명하다고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돼지족은 오히려 산모들이 젖 안 나올 때 푹 삶아 먹는 가정 요리로 더 유명했다.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족발 안주가 팔리기 시작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처음에는 일반 안주를 팔다가 시작한 것이니까. 이게 큰 히트를 친 거죠. 고기 안주니까 든든하고, 영양가도 높고, 양도 넉넉해 이만한 안주가 없었으니까요. ”
“좋은 재료가 가장 먼저지요. 족이 신선하면 냄새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재료를 넣을 이유가 없지요. 간장 넣고 푹 조리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장충체육관에서부터 동대문까지
장충동 일대는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각광받았고, 가까운 장충체육관에서 농구 경기가 벌어지면 가게는 손님으로 미어졌다. 동문들이 경기를 본 후 이 골목에서 뒤풀이를 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도 많이 왔다. 1990년대 경제호황기를 타고 24시간 영업 시대가 열리니 덩달아 족발집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심야에 동호대교를 타고 강남에서 사람들이 넘어왔고, 가까운 동대문 패션타운의 불야성도 도움이 됐다. 그쪽 손님과 종사자들이 일 끝나면 족발을 먹으러 왔다. 흥미로운 건 1997년에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국가 경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오히려 족발골목은 사람이 더 많이 몰렸다. 이 일대 가게들이 매출 신기록을 연일 경신했다고 한다. 족발 하나 놓고 서너 명이 2만원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 주머니 가벼운 시대에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그 후 족발은 막 태동하던 배달음식으로 가장 크게 성장한 업종이었다. 특히 당시 야간배달의 핵심 메뉴였다. 족발에 비빔막국수를 곁들여 배달하던 문화는 지금도 그대로다.
멋 부리지 않은 원조 맛의 힘
족발이란 말도 재미있다. 족이면 족이고 발이면 발이지 족발이라는 단어 중첩이 일어난 것은 민중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족으로 끝나면 심심해서 ‘족발’이라고 붙인걸까? 모를 일이다. 여러 설이 있는데, 족은 다리, 발은 문자 그대로 발을 뜻한다고도 한다. 실제로 족발은 발이 아니라 다리를 먹는 요리다. 발만 먹는 것은 시중에 ‘미니 족발’이라고 따로 부른다. 아닌 게 아니라 돼지 발은 먹을 게 별로 없다. 살보다는 복잡한 인대와 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족발은 99% 정강이 살이다.
“족발은 삶아서 껍질과 살을 같이 먹는 요리예요. 앞다리가 맛있다 뒷다리가 맛있다 하는 건 기호인데, 나름 다맛있죠. 뒷다리가 살이 적어서 보통 대·중·소 나눌 때 뒷다리는 ‘중자’, 앞다리는 살이 많으니 ‘대자’로 나갑니다.”
족발 요리는 깨끗하게 손질한 족발을 푹 삶는 단순한 음식이다. 그래서 더 수준 차가 난다. 희한하다. 맛있는 족발은 무슨 비결이 있는 걸까?
“좋은 재료가 가장 먼저지요. 커피니 한약재니 하는 건 넣지 않습니다. 족이 신선하면 냄새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재료를 넣을 이유가 없지요. 간장 넣고 푹 조리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뚱뚱이할머니집 주방에 들어가봐도 별 비결(?)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엄청난 기세로 끓고 있는 거대한 솥 2개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과거 호황기에는 이런 솥으로 열 번, 스무 번을 삶았다고 한다. 이렇게 삶은 족발은 한 김 식힌 후 썰어서 낸다. 써는 기술이 귀신같은 손놀림이다. 보기 좋고 맛있게, 살점을 알뜰하게 발라내야 한다.
장충동 족발은 얼마나 유명한지 전국 어디를 가든 장충동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족발집이 꼭 있다. 장충동은 독점적 명칭이 아니므로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상호를 등록하려면 장충동이란 명사 외에 특별한 이름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
이 골목은 일찍이 서울 미래유산이 됐다. 족발이라는 이 별난 음식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된 이력을 사람들은 기억 하게 된다. 완벽하게 서민적인 맛 뒤에는 이 골목을 만들어온 이북 출신 할머니들의 인생이 녹아 있다.
취향 따라! 개성 넘치는 족발 열전
족발의 시조 #장충동 뚱뚱이할머니집
장충동 족발골목의 시작을 알린 바로 그곳. 원조 족발의 맛이 궁금하다면 고민할 것도 없다. 3대째 이어오는 비법은 다름 아닌 국내산 재료의 신선함과 푸짐한 양. 쟁반막국수와 파전을 포함하는 세트 구성도 가성비 좋다. 大 5만원, 화요일 휴무.
위치 중구 장충단로 174-1
문의 02-2273-5320
튀김의 끝 #문래동 그믐족발
최근 tvN <줄 서는 식당>에 소개되어 그 인기를 인정받은 곳으로, 족발과 꽈리고추를 함께 튀겨내 맛은 물론 SNS 인증샷 맛집으로도 인기 많은 곳. 앞다리만 이용해 바삭하게 튀겨낸 족발은 마치 치킨 같은 식감으로 겉바속촉의 진수를 보여준다. 3만7000원.
위치 영등포구 경인로79길 21
문의 02-6104-6453
맵단짠의 정석 #창신동매운족발
일명 ‘창매족’으로 불리며 MZ세대의 입맛을 사로잡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족발 맛집. 돼지 껍데기가 쫄깃하게 씹히는 앞발 부분을 특제 양념으로 숯불에 구워내는데, 얼얼하게 매우면서도 계속 손이 가는 중독적인 맛이 일품이다. 大 2만9000원, 월요일 휴무.
위치 종로구 종로51길 23 창신골목시장
문의 02-3675-9689
한돈의 힘 #마포소문난원조족발
마포에도 족발골목이 있다. 여느 맛골목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족발골목, 전골목까지 알차게 들어선 공덕시장에서도 이곳은 오전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한가할 틈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족발을 시키면 순댓국도 제공해 더욱 든든하게 먹을 수 있다. 大 3만8000원, 주말 격주 휴무.
위치 마포구 만리재로 19 공덕시장
문의 02-716-9731
샐러드인가, 족발인가 #논현동 리북집
냉채족발의 원조는 다름 아닌 부산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는데, 알싸한 겨자 소스와 신선한 채소, 잘 삶아낸 꼬들꼬들한 족발이 어우러진 냉채족발 맛집으로 이곳을 추천한다. 상큼함을 좋아한다면 해파리냉채 추가는 필수. 3만8000원.
위치 강남구 학동로2길 45
문의 02-540-8589
글 박찬일 취재 김시웅 사진 정지원, 이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