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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고 넘는 서울

고개를 넘고 넘는 서울>
2022.07

문화

서울 옛 이름

고개를 넘고 넘는 서울

서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빼곡한 빌딩 숲과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자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서울의 동네로 떠나봤다.

망우동 - 중랑구

구리, 남양주 등 경기도 동부권과 강원도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관문에 자리한 망우동. 한때는 공동묘지 때문에 ‘망우리’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4만7700여 기의 묘가 있던 공동묘지로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전쟁기, 산업화 시기까지 수많은 망자의 안식처가 됐다.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다시 1998년부터 망우리공원으로 일컫다 2021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었다.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숲과 운치 있는 산책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이끌어간 인물들까지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 망우동은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가 되는 망우고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가 묏자리를 보고 온 후 ‘근심을 잊는 고개’라는 뜻으로 망우(忘憂)고개로 불렀다고 한다. 1963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고, 1988년부터 중랑구에 속하게 되었다.

+ 이야기 하나 더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위창 오세창, 화가 이중섭 등 위인 23명이 잠들어 있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원화 사업을 진행해 주민 친화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중턱에는 중랑망우공간도 개관해 주민의 쉼터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중랑둘레길 중턱에서 바라본 N서울타워.

무악재 - 서대문구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뜻하는 ‘무악재’.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위치해 지대가 전반적으로 높은 동네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 또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렀다. 또 말안장 현상의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렀다. 무악재라고 부른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삼각산(三角山) 인수봉이 어린아이를 업고 나가는 형상이라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했다. 또한 별칭으로 무학재 또는 무학현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성계가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무악 남쪽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으나, 일부에서 명당이 좁다고 반대했고, 결국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밑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 이야기 하나 더

조선 시대 인왕산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할 뿐 아니라 유난히 산세가 험준한 인왕산을 넘어 한양으로 입성할 때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재를 넘었다고 한다. 모여서 넘은 고개라는 데서 유래해 ‘모아재’라고도 불렀다.

덱 길을 따라 오르다 숨이 찰 즈음 도착하면 만날 수 있는 하늘다리와 무악재 표석.

미아리 - 성북구

‘미아’라는 지명은 조선 말 고종 초의 공식 기록에 처음 나오지만,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되너미고개를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불러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했다는 설과 미아제7동의 불당곡에 오랫동안 있던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되너미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의 기원이 된 고개이기도 하다. 현재의 위치상으로는 성신여대역 입구에서 길음역 방향으로 넘어가는 길이 미아리고개로, 언덕 제일 높은 곳에 미아구름다리가 보인다. 구름 다리 앞 작은 공원에는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기념비와 미아리고개의 유래 표석이 세워져 있다. 미아리고개는 먼 옛날부터 서울과 북방을 오가는 가장 큰 통로이자 관문이었고,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을 점령했으며, 후퇴할 때 이 길로 수많은 민족 지도자를 데리고 갔다고 전해진다.

+ 이야기 하나 더

미아구름다리 앞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작곡가 이재호가 지은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기념비를 볼 수 있는데, 6·25 전쟁 때 남편과 생이별하며 창자가 끊기는 고통을 표현한 노래다. 이렇게 미아리고개는 이별의 상징과도 같은 눈물 고개가 되었다.

미아리고개 유래가 새겨진 표석.

미아구름다리에서 내려다본 돈암동 전경.

류창희 사진 한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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