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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일상, 그래서 특별한 2021 겨울

기획 · 나의 서울

낯선 일상, 그래서 특별한 2021 겨울
2021.02

조용한 서울이라니, 믿을 수 없어

뭔가 낯선 요즘이다. 허전한 이 느낌. 뭐가 없는 걸까? 아… 너무 조용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눈썰매를 타던 동네 골목, 새천년을 알리는 타종식을 직접 보겠다고 야심 차게 나갔다가 난생처음 보는 인파에 휩쓸렸던 종로, 친구들과 멍하니 앉아 서로를 찾는 화려한 사람들을 구경하던 강남역 골목, 대학교부터 첫 직장인 대학병원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겨울을 보낸 신촌 거리. 그 모든 곳에서의 겨울은 눈부셨었다

한겨울의 서울에서 태어나 한 도시에서 쭉 지내온 내게 이토록 조용하고 축제가 없는, 활기차지 않은 서울의 겨울 길은 낯설다. 생각해보면 그 겨울들, 그때의 내 마음이 그리고 그 순간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친구 문제나 연애 문제로 고민하고, 상처받고, 학업과 취업과 직장 생활 등 다양한 문제로 고통받는 우리가 그 겨울들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들이 내 기억 속에 눈부신 이미지로 남은 이유는 홀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방구석이 아니라 축제 분위기의 거리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겨울의 세로토닌

겨울에는 길거리에 보이는 나무와 겨울잠을 자고 있을 개구리뿐 아니라 사람의 생기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서 알았다. 겨울이 되면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우울감을 호소한다. 얼마 전 가을까지만 해도 잘 회복되어가던 분의 우울증이 갑작스레 악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평소에 비해 해가 짧게 뜨는 이 시기에 체내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추위로 인해 활동량도 줄어들어 무기력을 더 키운다. 또한 지난 한 해의 부족함을 떠올리고 자책하며 우울해지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약속이나 한 듯 겨울이 되면 밝아지는 거리 분위기, 울려 퍼지는 캐럴, 한해의 끝과 시작에 환호하며 서로 축복하는 그 모든 모습에는 숨은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겨울 중에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우리의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자칫하면 어둠과 추위 속에 혼자 남겨져 한없이 무기력해져가는 누군가를 만들지 않으려는 집단적인 시도가 아니었을까. 설령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실제 그런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살아오며 겪은 수십 번의 겨울과 다른 이번 겨울에 처음으로 느끼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추위의 조합이 빚어낸 이 외로움과 조용함 속에 우리는 약간씩 무기력해지며 우울감과 가까워지고 있다. 요즘은 삶의 재미가 없다는 말을 진료실에서 수없이 들을 뿐 아니라 나 역시도 친구들과 그런 대화를 나눈다.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마치 아빠와 아들처럼 보이는 눈사람. ©임영란

일상의 회복은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일부터

얼마 전 큰 눈이 왔다. 평소의 3배는 걸린 여정 속에 녹초가 되어버린 퇴근길 끝에는 따뜻한 저녁이 아닌, 눈사람 만들기라는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바로 아이들에게 붙들려 놀이터로 가게 되었다. 지난 몇 달간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점차 한산해지던, 여기에 추가된 한겨울의 추위 속에 인적이 사라져버린, 요즘의 우리 마음을 반영하는 듯하던 동네 놀이터. 하얀 눈이 덮인 그곳에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겨울이 있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큰 선물을 받은 듯 신이 나서 북적거리는 그 공간 속에 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감정에는 전염성이 있다. 나뿐 아니라 그곳의 모든 부모 역시 들뜨고 신난 모습이었다. 그래, 이게 내가 기억하던 서울의 겨울이다. 당연히 모든 곳이 밝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를 밝게 만들어주는 순간들로 가득한. 단 하룻밤이었지만 그날의 들뜬 기분은 무기력에 침잠해가던 내게 꽤나 큰 선물이 되었다

단순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충전으로서의, 필수불가결의 기간. 분명히 모두가 아는 겨울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자주 잊는다. 저 밖의 나무들에게도, 길고양이들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지금의 추위가 끝나고 생명력이 피어나는 순간은 매번 그랬듯 반드시 온다. 몸의 추위도, 마음의 추위도 반드시 끝이 있다. 춥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따뜻했던 예전 서울의 겨울도 반드시 다시 온다. 아니, 아마도 더 따뜻하겠지. 강렬한 욕구는 결핍의 경험에서 생겨나니까

마침 이 글을 쓰는 오늘도 큰 눈이 예보되어 있다. 내일 출근길은 많은 사람이 힘들 것이고 나 역시 힘들겠지만, 그건 내일 일이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은 서울의 겨울이 주는 지금의 선물을 누려야겠다.

김지용

©김지용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대중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 <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어쩌다 정신과 의사> 등의 책도 썼다.

김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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