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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흐르는 공간, 예술을 담다

인터뷰 · 탐방 · 서울 산책

역사가 흐르는 공간, 예술을 담다
2020.08

1970년에 지어진 유진상가는 서울의 역사와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유진상가 지하, 홍제천이 흐르는 공간이 50년 만에 예술 공간
‘홍제유연’으로 거듭났다. 빛이 흐르는 예술길을 걸어보자.

거대한 기둥 위에서 지켜온 역사

서대문구 홍은사거리, 내부순환로를 이고 있는 듯한 거대한 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1970년 홍제천을 복개한 인공 대지 위에 지어진 유진상가다. 얼핏 봐도 상당히 거대한 이 건물의 특이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1층 가로변에 세워진 거대한 기둥과 빈 공간들이다.

유진상가가 지어진 1970년 무렵은 남북 관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인근 지역까지 내려왔던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들의 침투로 ‘안보’가 국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구파발을 뚫고 남하할 경우 이를 저지해야 하는 수도권 방어선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유진상가는 군사시설물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즉 유진상가 가로변에 세워진 기둥들은 시가전을 대비해 탱크를 숨기는 공간인 동시에 기둥을 부술 경우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세검정로를 차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상가 건물 전체가 최후의 방어선에 거대한 방어 기지로 설계된 만큼 튼튼하게 지어져 보수 공사를 하는 업자들 사이에선 ‘못 박기 어려운 건물’로도 유명했다. 서울 시내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단위면적당 많은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강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1977년 내부순환로가 들어서기 전, 유진상가와 홍제고가차도.

초기형 주상복합 아파트로서 누렸던 전성기

유진상가는 1970년대 당시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로 서대문의 랜드마크였다. 폭 50m, 길이 200m의 이 거대한 건축물은 1층 전체와 2층 일부는 상가로 쓰이고 나머지는 주거용으로 사용된다. 세대별 분양 면적이 다른 상가아파트에 비해 월등히 넓어 최소 33평, 최고 68평에 달했다. 주거동 외벽에 쓰인 ‘유진맨숀’이라는 이름만 봐도 당시 얼마나 고급 주택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초기 입주자의 상당수가 정부와 법조계 고위직이었다.

유진상가는 또한 특이한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A동과 B동, 2개 동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가운데에 중앙 정원을 두고 연결되어 있다. 특이한 구조의 고급 맨션은 1992년 내부순환로 공사와 함께 B동의 3~5층이 없어지면서 지금의 불균형한 모양새로 변했다. 이후 B동은 신지식산업센터와 청년 공간 무중력지대, 중장년층을 위한 50플러스센터가 입주해 공공건물로서 기능하고 있다.

유진상가 하부 공간에 새롭게 조성한 홍제유연 입구.

목영선

유진상회 대표, 유진아파트 거주

“1981년부터 과일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때는 유진아파트에 유명한 분도 많이 살고 장사가 참 잘됐어요. 여름에는 수박을 삼륜차로 두 대씩 팔 정도였죠. 이후 내부순환로 공사로 B동이 잘려나가는 것도 보고, 유진상가가 변해가는 모습을 오래 지켜봤습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과 분위기지만 정이 많이 들었어요. 또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유진상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술가들의 전시 무대, 시민들의 예술 놀이터

서울시는 매년 1개의 대상지를 선정한 후 공공미술을 통해 특별한 장소로 바꾸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을 진행한다. 2019년 공공미술 대상지 공모로 장소성과 역사성 등을 종합 평가해 서대문구의 유진상가 지하 공간을 선정했다. 유진상가는 1970년 대전차 방호 기지이자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지어진 이래 많은 개발과 변화의 역사를 품은 근현대 건축 자원이다. 그 건물 하부 공간을 50년 만에 발굴해 시민 누구나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물과 사람의 인연이 흘러 예술로 치유하고 화합한다’는 뜻을 지닌 ‘홍제유연(弘濟流緣)’은 낡은 콘크리트 구조와 자연이 조화된 지하 공간 특유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했다. 또한 빛, 소리, 색, 기술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미술을 선보이는 예술가들의 전시 무대이자 시민들의 예술놀이터로 완성됐다.

“마치 먼 미래에서 콘크리트 유적지를 방문한 것 같은 특별한 감각과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에 주목했습니다. 공간이 어둡기 때문에 작품들이 빛의 속성을 띠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빛이 전달하는 감각과 메시지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홍제유연의 예술 기획을 맡은 장석준 작가는 새롭게 시작되는 인연의 만남으로 화합하고 치유하는 공간, 시민이 바쁜 일상 속에서 온전한 쉼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지정된 센서에 체온이 전해지면 조명의 색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기술을 적용한 작품 ‘온기’(팀코워크).

‘화합과 이음’의 메시지를 담은 공간

홍제유연은 건물을 받치는 100여 개의 기둥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설치미술, 조명 예술,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등 8개 작품이 설치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홍제천의 긴 역사 이야기를 빛 그림자로 표현한 설치미술 작품 ‘흐르는 빛_빛의 서사’와 홍제천의 생태적 의미를 담아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3D 홀로그램 영상 작품 ‘미장센_홍제연가’ 등 아름다운 빛들이 홍제유연 속을 흐른다. 인왕·홍제초등학교 학생 20명이 완성한 야광 벽화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와 ‘내 인생의 빛’을 주제로 시민 1000명의 따뜻한 메시지를 모듈에 새겨 돌리면서 감상하는 ‘홍제 마니차’ 등 시민의 참여로 완성한 작품도 있다.
‘숨길’은 200m가 넘는 깊은 길인 홍제유연에 자연의 빛이 드리운 듯한 숲 그림자 산책길을 만들고 12시간 동안 시간의 변화에 어울리는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사운드아트 작품 ‘쉼’이 결합한 작품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의 정서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해준다.

“‘미장센_홍제연가’는 5분가량의 스토리를 지닌 작품입니다. 우주의 시작점인 불씨부터 인류의 탄생과 달 착륙까 지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며 감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위부터) 시민의 메시지를 담은 시민 참여 작품 ‘홍제 마니차 ’,
태초부터 영속되는 생명의 탄생과 생태계 순환의 의미를 담은 3D 홀로그램 영상 작품 ‘미장센_홍제연가’(진기종).

진기종 작가의 ‘미장센_홍제연가’는 공공미술 최초로 3D 홀로그램을 활용했다. 중앙부를 포함해 크기가 다른 9개의 스크린이 연동되어 홍제천의 생태를 다룬 영상이 입체적으로 떠오르는 독특한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또 42개의 기둥을 빛으로 연결한 라이트아트 작품 ‘온기’를 배경으로 홍제천의 물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보는 독특한 경험은 홍제유연에서만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을 위로해주는 일상의 쉼터가 되고, 가까운 곳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공공미술 전시장으로서 새로운 인연을 이어갈 홍제유연을 기대한다.

홍제유연위치 유진상가 지하부의 홍제천에서 홍제교 하부까지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

(왼쪽) 진기종 ‘미장센_홍제연가’ 작가
(오른쪽) 장석준 ‘홍제유연’ 예술 기획자

“유진상가로 인해 50년 동안 단절되었던 지하 공간이 상가의 역사와 함께 발견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간을 구성할 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가장 어렵고 고민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감각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양하고 새로운 인연과 경험이 ‘홍제유연’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품을 보러 오는 전시장만이 아닌 만큼 최대한 불편하지 않고, 몸으로 다양한 쉼과 치유의 감각을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서울의 역사를 품은 뉴트로 상가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 세운상가

세운상가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다. 1960년대부터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로 이름을 날렸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다던 산업군은 용산전자상가를 필두로 빠져나가기 시작해 상권이 쇠락했다가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건물과 상가를 재생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위치 종로구 청계천로 159

악기와 실버 세대의 공존, 낙원상가

낙원시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주상복합 1세대 건물 중 하나다. 당시에는 남산시민아파트와 함께 고급 아파트로 명성을 날렸다. 지금은 악기를 사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과 4층 허리우드극장을 찾는 실버 세대들로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치 종로구 삼일대로 428

황혜민 사진 한상무 사진 제공 서대문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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