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지글, 타닥타닥. 비 오는 날이면 넓은 철판 위에 기름 넉넉히 둘러 부쳐내는 빈대떡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서울에서 즐기는 최고의 한 접시를 만나보자.
대중가요는 당대 사회를 반영한다. 유행가의 가장 큰 주제는 역시 남녀 간의 사랑인데, 불과 20여 년 전과 최근의 노래 가사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사랑에 주도적이며, 사랑에 대한 감정도 ‘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유행가를 통해 인간사의 세세한 사정을 엿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음 노래는 어떤가.
“비단이 장수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돈 퉁퉁 털어서 다 줬소/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이 좋구나.”
1938년에 발표된 김정구의 노래 ‘왕서방 연서’의 한 대목이다. 이 노래는 단순히 흥미로운 중국인을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중국인(화교)이 대거 조선 땅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많은 돈을 벌어간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시기의 노래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노래도 한 토막 읽어보자.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밖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중략)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1943년에 발표된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다. 이 노래는 지금도 라디오 등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리메이크도 여러 번 이루어졌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대폿집에 주목한다. 대포란 큰 술잔을 의미한다. 막걸리는 예나 지금이나 싼 술이다. 거기에 빈대떡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노래에서는 비꼬는 대상으로 사용되었지만 싸고 만만한 안주였다는 건 분명하다. 지금도 빈대떡은 서울을 중심으로 살아남았다. 대중적인 안주로 빈대떡은 역사가 오래된, 선술집의 터줏대감 격이다.
해방 후 발행된 <자유신문> 1948년 12월 16일 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빈대떡’이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글쓴이는 유영륜이며, 그는 자그마한 무역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쓰여 있다. 그는 늘 빈대떡에 술 먹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이 집을 극성으로 찾아간다.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구수한 빈대떡에 약주맛이 유달리 기막히다. (중략) 해방 후에 급속도로 보급된 것이 빈대떡인데, 하여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이다. 개중에는 빈자(貧者)떡, 빈대병(賓待餠), 함흥식 지짐이, 평양식 지짐이 등으로 부르는데, 어쨌든 모든 이름이 귀일되는 것은 녹두지짐이다.”
황해도에 예로부터 ‘막부치’라는 전이 있었고 빈대떡은 대체로 이북의 명물이었다고 하는데, 서울에서도 전통적으로 유행했다. 서울 명물로 설렁탕, 해장국, 냉면과 함께 빈대떡이 오랫동안 꼽혀왔다. 만들기 쉽고 맛있는 빈대떡은 난전에서 파는 경우도 많았다. 난전은 정식 가게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리 도구와 화력을 갖추기 쉽지 않아 미리 집에서 부쳐 가지고 나와 데워 팔았다고도 하고, 어떤 경우는 직접 장작 등을 때어 빈대떡을 부쳐서 팔기도 했다. 우리가 민화 등에서 보는 주막집의 주요 음식과 안주가 해장국과 빈대떡이었을 것이다. 일단 부치기 쉽고, 맛도 좋기 때문이다. 돼지기름 등을 사용하면 훨씬 더 맛이 좋다 .
위에 인용한 유영륜의 글을 보면 그의 단골집은 을지로입구에 있다. 재미있게도 이 지역은 현재도 빈대떡집이 성업 지글지글, 타닥타닥. 비 오는 날이면 넓은 철판 위에 기름 넉넉히 둘러 부쳐내는 빈대떡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서울에서 즐기는 최고의 한 접시를 만나보자. 지금도 빈대떡은 서울을 중심으로 살아남았다. 대중적인 안주로 빈대떡은 역사가 오래된, 선술집의 터줏대감 격이다. 하는 종로와 을지로 권역 안에 있다. 옛 기록에는 정동에 빈대떡집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사대문 안, 좁은골목 등에서 간단히 팔기에 빈대떡만 한 안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인기가 높았다. 한복남의 노래에 빈대떡이 거론된 것은 그만큼 흔하고 대중의 인기가 있던 음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빈대떡은 전문집도 있었지만, 웬만한 대폿집이나 목로주점에서도 기본적인 안주였다. 목로주점이란 기다란 나무판자를 깔고 거기에 미리 만들어두거나 준비한 안주를 나열해놓고 팔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목로가 ‘기다란판자’란 뜻이다. 너비아니(불고기의 원형), 빈대떡 등이 이곳의 주요 안주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돼지기름이나소기름 등에 부쳤을 것이다. 식물성 식용유가 귀했고, 원래 빈대떡은 동물 기름에 부쳐 먹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돼지고기를 각별히 좋아하는 이북(평안도)식 빈대떡이 서울에도 많은 것은 이런 까닭이다. 대개 평양냉면집에서 곁들이로 빈대떡을 파는데, 이는 그 음식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빈대떡, 언제부터 먹었을까?
그럼 빈대떡은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을까. 일설에 따르면 빈대떡은 본디 독립적인 음식이 아니라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고배(제물의 받침)로 쓰던 것이라고 한다. 제사상은 제물을 높이 쌓아야 볼품이 있고 잘 차린 상이다. 그러자면 준비한 개별 음식만으로는 높게 쌓기 힘들다. 비용이 많이 든다. 이때 빈대떡을 고임용으로 많이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치기 쉽고, 비용도 쌌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서민 음식으로 여겨지는 빈대떡이 왕가 음식에도 쓰였다는 것이다. 신선로가 그것이다. 신선로를 만들려면 우선 빈대떡부터 부쳐 넣는 것이 기본 조리법이다. 말하자면 빈대떡은 서민부터 왕족까지 두루 먹던 음식이라는 이야기다.
빈대떡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역어유해(譯語類解)>라는 어학서에 따르면 빈대떡은 떡 병(餠)에 놈 자(者)를 써서 ‘병자’라고 부른다. 이것이 음운 변화에 따라 병자 > 빙자 > 빈대로 전이되었을 수 있다고 故 이규태 선생이 밝힌 바 있다. 더불어 서울 정동에 부침개집이 많았는데, 정동이 빈대가 많아 ‘빈대골’이라고 불린 데에 착안해 부침개가 빈대떡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827년에 발행된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중국의 콩가루떡 인 ‘알병’이 와전되어 ‘갈병’이 되었다가 빈대떡이라는 한 글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알(?)과 갈(蝎)은 비슷한 한자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 자체가 바로 빈대 떡이 원류는 알 수 없으나 누구나 사랑하는 흥미로운 음식 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서울 세종로 네거리의 교보빌딩 뒷골목은 옛날부터 빈대떡으로 유명했다. 삼청동에서 발원해 지금의 여성가족부청사 앞에서 청계천에 합류하는 중학천을 복개하면서 만들어진 골목이다. 이 골목에 빈대떡집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중학천이 복개되기 이전인 한국전쟁 직후라고 한다. 이 길을 흔히 ‘피맛골’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지도에서 보면 피맛골은 경복궁 앞에서 창덕궁 앞까지 이어진 길이었다. 왕이나 고관대작의 행차가 지날 때마다 발을 멈춰야 했던 큰길의 뒤편으로, 서민들이 신경 쓰지 않고 놀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서울은 이 밖에도 많은 곳에서 빈대떡을 부쳐왔고, 지금도 성업 중이다. 막걸리 한잔에 곁들이는 기름이 자르르하면서 고소한 빈대떡 한 장은 어쩌면 서울시민의 희로애락과 함께해온 전설적인 음식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 부침개 즐기기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빈대떡 로드 #TMI
비 오는 날엔 파전 #회기역 파전골목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을 위해 지금의 회기역 자리를 돌아 중랑천으로 흐르는 개천을 끼고 생겨난 파전골목은 인접한 경희대학교를 비롯해 서울시립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의 참새 방앗간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해물과 파가 듬뿍 들어가 두툼한 이곳의 파전은 ‘한국식 피자’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다.
이모네왕파전 파전을 기본으로 한 다양한 구성의 세트 메뉴로 유명. - 02-959-8318
노천파전 전체적으로 바삭하면서도 김치가 살짝 첨가된 해물파전이 인기. - 02-968-2494
취향대로 골라 먹자 #마포 전골목
공덕역, 공덕시장, 마포시장, 공덕동 족발골목과 인접한 마포 전골목은 길지 않은 좁다란 골목에 서로 마주한 두 가게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계단식으로 구성된 진열대에 전과 부침개, 튀김이 깔끔하게 줄 맞춰 있는 이곳은 취향에 따라 골라 담아 먹을 수도 있고, 모둠 전이나 다른 메뉴를 주문할 수도있다. 명절을 앞두고 제사용 음식으로 주문 포장이 많다고 하니 기억해두자 .
마포할머니빈대떡 원조 빈대떡집. 다양한 전과 즉석 주문이 가능한 메뉴로 구성. - 02-715-3775
마포청학동부침개 마치 뷔페에 온 듯 가득한 메뉴 중에서도 튀김의 인기가 강세. - 02-706-0603
빈대떡 성지 #동대문 광장시장
광장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출입구 중에서도 북2문, C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빈대떡거리에는 단골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빈대떡집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통시장 중에서도 단일 품목으로 가장 유명한 골목인 만큼 광장시장의 빈대떡은 널찍한 녹두빈대떡 한 장에 4000원 선, 고기 완자는 2000원 선으로 가격 또한 저렴해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원조순희네빈대떡 광장시장 본점과 맞은편 별관, 중앙 노점만 운영한다. - 02-2264-7774
박가네빈대떡 기본 빈대떡부터 해물빈대떡까지 인기다. - 02-2264-7774
통큰누이네육회빈대떡 빈대떡과 마약김밥, 육회 등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 02-2268-3344
박찬일 추천 #빈대떡노포 #서울미래유산 열차집
서울시에서는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대상 중 시민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간직한 추억과 감성을 지닌 유산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보전 중이다. 서울시민의 추억이 깃든 오래된 가게중에서도 ‘열차집’은 1950년에 처음 문을 연 빈대떡 전문 식당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종로구 내 세종로 뒷길 한옥골목에서 시작해 피맛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지만, 개업 이래 같은 지역에서 69년 넘게 이어온 열차집은 오늘도 추억을 찾아서 온 단골은 물론, 뉴트로 열풍을 타고 온 젊은이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열차집의 메인 메뉴인 빈대떡은 즉석에서 간 녹두를 돼지기름에 손바닥만 한 크기로 부쳐 나온다. 부침개를 부치는 철판의 중심이 높아 기름의 바삭함은 살아 있으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맛이 특징이다. 함께 나오는 어리굴젓 또한 일품이다. 전국의 맛으로 이름난 막걸리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열차집은 착한 가격과 착한 맛으로 오늘도 쉼 없이 달린다.
글 박찬일취재 김시웅사진 장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