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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대경성으로, 뉴욕은 대공황으로

서울은 대경성으로, 뉴욕은 대공황으로>
2017.10

문화

역사 속 평행이론

서울은 대경성으로, 뉴욕은 대공황으로

서울

경성 전역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도시계획

야심 차게 시작한 ‘서울 황도 만들기 프로젝트’는 1910년 대한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좌초되었다. 500년 조선의 왕도에서 대한제국의 황도로 격상되었던 서울의 위상은 경기도에 편입될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 ‘도성 밖 10리(성저십리)’까지 관할하던 행정구역도 성저십리가 대부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확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울은 다시 예전의 영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들어 식민지 조선의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경성의 인구가 크게 늘었다. 이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민간 업자들은 조선 시대 고관대작들이 살던 북촌의 대저택들을 잘게 나누고 여러 채의 집을 지어 팔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집을 잘게 나누어지어도 전국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택뿐 아니라 교육과 위생 등의 문제도 대두되자 일제는 경성의 행정구역을 대폭 늘리는 등의 도시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일제가 대륙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면서 꿈꾸던 ‘대동아공영권’의 중심 도시로 경성을 자리매김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제는 몇 년간 교통, 산업 등 각종 사회 조사를 수행한 후 경성 전역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도시계획을 입안했다. 1929년을 기점으로 30년 후인 1959년까지 인구 110만의 ‘국제도시 대경성’을 건설한다는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에 따라 세부적 계획도 세워졌다. 영등포 일대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분기하고 수운이 편리한 이점을 살려 공장 지역으로 개발하고 청량리 부근은 주거와 상업 지역으로, 노량진 방면은 주택 지대와 수변 공원으로 계획했다. 오늘날의 ‘수도권’과 비슷한 광역도시권을 구상하기도 했다. 결국 전쟁에 패하면서 일제의 대경성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때 세운 도시계획은 해방 후 지금까지 서울의 큰 밑그림이 되었다.

뉴욕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뉴욕발 대공황

서울에서 대경성 프로젝트를 수립한 바로 그해, 메트로폴리스 뉴욕은 대공황의 늪에 빠졌다.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에 발생한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이 출발점이었다. 대부분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면서 뉴욕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주식 투자를 했던 사람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고, 대규모 인출 사태(뱅크런)가 발생하면서 은행마저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사가 줄지어 도산하면서 실업자가 속출했고, 물가는 폭등하고 식량은 구하기 어려워졌다. 화려한 메트로폴리스 뉴욕은 도시 빈민과 부랑자들이 몰려다니며 강도와 약탈을 일삼는 ‘다크 시티’로 전락했다. 뉴욕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미국의 기업체 가동률은 20%대로 떨어지고 실업률은 40%에 육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공황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1929년 뉴욕발 대공황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완회(작가)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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