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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황도(皇都)가 되고, 하와이는 미국이 되다

서울은 황도(皇都)가 되고, 하와이는 미국이 되다>
2017.09

문화

역사 속 평행이론

서울은 황도(皇都)가 되고, 하와이는 미국이 되다

서울

동양적 전통과 서구적 근대도시의 공존

1897년 10월 12일. 이른 아침부터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앞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한 곳,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지금의 대한문)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대안문이 열리고, 태극기를 앞세운 행렬이 궁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태극기 뒤로는 총검을 든 군인과 만조백관들이 줄을 이었고, 그 중심에는 고종이 있었다. 인파에 둘러싸인 고종의 행렬은 지금의 시청 앞 광장을 지나 환구단으로 향했다. 현재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둥근 제단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이는 황제뿐이었다. 이날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더불어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고, 서울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의 수도, 황도가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은 대한제국의 황도에 걸맞게 재편 되기 시작했다. 변화의 핵심은 도시의 중심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의 임시 거처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경운궁은 확장 공사를 거쳐 조선 최초의 황궁으로 변신했다. 경운궁 북쪽의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 동쪽의 구리개길(지금의 을지로), 남쪽의 소공로와 서쪽의 공관로(지금의 정동길) 등이 정비되었다. 덕분에 조선 초 이래 큰 변화가 없던 서울의 도로 체계는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구조로 바뀌었다. 도로 정비 사업과 함께 서울 최초의 도시 공원도 이때 등장했다. 조선 세조 때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석탑 주위에 빽빽이 들어선 민가를 철거하고 조성한 탑골공원이 그것이다. 도시 공원은 근대도시로의 변화를 의미했다. 이는 또한 고종이 추진한 자주적 근대화를 상징했다. 고종은 서울을 황도로변화시킴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황제국만이 가질 수 있는 환구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것도 이러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와이

미국과 하와이 합병조약

서울이 황도가 되던 해,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나라 하와이는 미국과 합병 조약문을 체결했다. 이로써 1810년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제도의 섬들을 통일해 세운 하와이 왕국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태평양 섬 중 유일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한 카메하메하 1세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상당한 근대화를 이루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미국인들이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면서 점차 하와이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역대 하와이 국왕들이 영국과 일본 등에 미국을 견제해달라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결국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인들의 농장을 국영화하자 이들은 미 해군을 동원해 여왕을 쫓아냈다. 그 후 미국과의 합병조약을 거쳐 하와이를 미국 땅으로 만든 것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의 일이다.

구완회(작가)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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