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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도 서울,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조선의 수도 서울,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2017.05

문화

역사 속 평행이론

조선의 수도 서울,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

서울

‘600년 수도 서울’ 서막이 오르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하면서 ‘500년 도읍지’였던 개경(개성)의 운도 다하였다. 개경에 뿌리박고 있던 고려의 지배 세력을 억누르고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해 천도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후보지는 한양(서울)이었다. 고려 말에 이미 천도를 시도했을 만큼 한양의 지리적 장점은 검증된 상태였으니,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태조가 한양 천도를 명한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양 천도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개성에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신하들은 새 왕조를 지지했으나 기득권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

결국 한동안 중단되었던 천도 논의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풍수도참설에 의해 계룡산 일대가 명당으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태조는 직접 계룡산으로 가서 지세를 살피고 새 수도 건설을 명했다. 풍수도참설을 명분으로 신하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천도를 밀어붙인 것. 하지만 “계룡산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어 도읍이 되기에 부족하다”반론이 나오자 태조는 공사를 중단하고 새로운 수도를 다시 물색했다. 이제 천도는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 계룡산에 이은 후보지는 무악(지금의 신촌 일대)이었다. 지금이야 신촌도 서울의 일부지만 당시 한양(남경)은 지금의 사대문 안을 가리켰다. 무악에 대해서도 공론이 분분했다. 한양을 마음에 두었던 태조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마침내 1394년, 2년을 끌던 천도 논의는 한양으로 끝을 맺었다. ‘600년 수도 서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마르칸트

칭기즈 칸 후예가 건설한 ‘최후의 유목 제국’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된 다음 해,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는 킵차크 한국과 동차가타이 한국을 정복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최후의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4개의 한국(칸국) 중 하나인 차가타이 한국에서 태어난 티무르는 비록 몰락한 가문 출신이지만 젊어서부터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알렸다. 때마침 차가타이 한국의 칸(왕)이 살해되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티무르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티무르의 일생은 롤모델로 삼았던 칭기즈 칸처럼 전쟁과 정복의 연속이었다. 중앙아시아 길목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 호라즘을 점령하고 이란 동북부를 차지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아까지 지배했다.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년에 칭기즈 칸의 후예가 다스리던 일한국을 정복하고 2년 후 나머지 2개의 한국까지 정복하면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600여 년이 흐른 21세기,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의 유적이 풍성한 세계적 관광지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동아시아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글 구완회(작가) 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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