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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 위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보다

보루 위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보다>
2015.07

여행

서울 둘레길

둘레길 문화읽기 ③ 용마·아차산 구간

보루 위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보다

서울 둘레길 서울둘레길 2코스 용마-아차산 구간(화랑대역~광나루역)

아차산에서 내려다 본 전경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둘레길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봉산역에서 출발한 서울둘레길 1코스가 끝나고, 2코스가 시작되는 곳은 화랑대역이다. 경춘선 열차의 간이역이던 옛 화랑대역은 2010년 겨울 끝자락에 문을 닫았다. 둘레길은 6호선 지하철이 지나는 화랑대역(서울여대입구)에서 출발한다. 새로 만든 둘레길은 이미 옛길이 되어버린 녹슨 철로를 가로질러 건넌다.



목동천을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 목동천 거슬러 새우개다리 건너


기차가 떠난 빈 철길은 화랑대라는 지명을 만든 육군사관학교 쪽으로 향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둘레길은 묵동천 천변을 따라간다. 묵동천은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입구와 신내동에서흘러오는 개천이 합쳐져 묵동으로 흘러가는 중랑천의 지류다. 물길을 거슬러 신내동 쪽 상류를 향해 걸었다. 그늘 없는 초여름 천변은 뜨겁다. 온 나라가 가뭄을 걱정하는 때, 묵동천에는 맑은 물줄기가 나직이 흘러가고 있다. 수풀 사이로 헤엄치는 청둥오리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원래 큰비가 내려야만 겨우 물이흐르던 건천이었지만, 지금은 물재생센터로부터 공급 받은 깨끗한 물을 연중 흘려보내고 있다. 결국 묵동천으로 사람과 새들이불러 모은 물소리가 값비싼 전기계량기가 돌아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뜨거운 태양 아래 빗줄기 생각이 더 간절했다.

새우개다리에서 묵동천을 건너 다시 물길따라 걷다가 ‘신내동 동네숲’으로 들어간다. 아담한 숲이다. 새우개는 신내동에서 구리시 갈매동으로 넘어가던 고개가 새우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팍팍한 삶을 으레 새우등처럼 고단하게 느껴서일까. 우리나라 곳곳에 비슷한 지명이 여럿 있다. 지금은 새우등도 자동차로 편하게 넘어간다.

둘레길은 중랑캠핑숲까지 줄곧 아스팔트 옆 인도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갈림길이나 횡단보도를 만나면 보도블록 위에 찍힌 붉은 화살표나 전신주에 걸린 표지판을 찾아 두리번거려야 한다. 빠르게 앞만 보고 걷다 가던 길을 되돌아오며 헤매다 보니‘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인생의 길 위에서도 멀리 내다보기 전에 먼저 자기 발밑부터 찬찬히 살펴야 한다고, 캠핑 숲 그늘 아래 벤치에서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중랑캠핑숲에서 망우리공원으로 곧장 연결되는 망우로 횡단교량이 올 12월 개통을 목표로 추진 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횡단보도를 찾아 멀리 돌아가야 한다. 망우로는 망우리고개를 지나 구리시로 향하는 경춘국도의 일부다. 망우리고개 너머에는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부터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까지 모두 9개의 왕릉을 모신 동구릉이 있다. 이성계가 그곳에 자신의 묫자리를 봐두고서야 비로소 근심을 잊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망우리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자식들의 불화로 바람 잘 날이 없던 궁궐에서 나와 무덤 자리를 보고 걱정을 잊었다면 비로소 모든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웠다는 뜻일까. 그런 왕의 근심과 고개를 넘나들던 숱한 백성들의 시름이 똑같을 수야 없겠지만, 누구든 고갯마루에 오르면 서늘한 바람 맞으며 훌훌 잊고 싶은 게많아서 생긴 이름이 아닐까.


망우리공원 입구에서 멀리 불암산이 보인다. 오래된 무덤 사이 서늘한 숲길 따라 용마산과 아차산으로


이제 길은 양지바른 무덤들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 망우산자락 깊숙이 들어간다. 비로소 길은 자동차로부터 멀어지고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숲을 활짝 열어준다. 망우리공원은 1933년부터 서울시 공동묘지로 쓰였는데 40년 만에 가득 차서 1973년부터 더 이상 새로운 묘지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망자를 찾는 가족보다 고즈넉한 숲길을 찾는 탐방객이 늘었다.

소파 방정환을 비롯해 만해 한용운, 독립운동가 오세창, 종두법을 시행한 의사 지석영,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정치가 죽산 조봉암 등 우리 근현대사에서 선이 굵은 자취를 남긴 이들의묘가 모여 있는 것도 망우리공원을 친근하게 만든 이유다. 둘레길이 지나는 산책로에는 이름난 묘 주인들의 연보를 적은 비석들이 서 있다. 그중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 통속하거늘 한탄할 / 그 무엇이 무서워서 / 우리는 떠나는것일까”라고 ‘목마와 숙녀’ 구절을 적어 놓은 박인환의 연보비가 길 위에 선 사람들을 위한 노래처럼 눈에 들어온다. 실제 그의 묘소는 비가 서있는 길가에서 아래쪽 비탈로 내려가야 한다. 길 양옆으로 울창한 숲 구석구석 많은 묘들이 자리 잡고 있다.

널리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아니라도 7,900여 기가 넘는 묘에 묻힌 누구 하나 귀하지 않은 목숨은 없었을 것이다. 묘지들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산책로 위에는 벚나무에서 떨어진 버찌가 발밑에 으스러져 검은 점처럼 흩어져 있다. 검은열매는 화려한 벚꽃의 주검인 동시에 부활이라고 나무가 길 위에 손수 시를 쓴 것 같다.

망우산 둘레길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용마산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시작된다. 푹신한 흙길을 도심에서 지친 발이 먼저 반긴다. 지금은 모두 별개의 산으로 지칭하지만 본래망우산(281m)부터 용마산(348m), 아차산(286.8m)까지 모두 아차산이라는 큰 덩어리였고, 그중 가장 높은 곳을 용마봉이라 불렀다. 아차산 큰 산줄기는 망우리고개 북쪽, 동구릉을 품은 검암산부터 북에서 남으로 한강을 향해 길게 늘어선 서울의 동쪽 울타리다. 용마산에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기 위해 깔딱고개의 570개 계단 위로 올라선다. 숨이 차오르는 가파른 길이지만 고된 만큼 눈앞의 풍경은 달다.


용마산과 아차산 구간 둘레길은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용마산을 오르는 깔딱고개 산마루에서 강물의 역사를 읽는 길


높이 올라가면서 산줄기 동쪽으로 한강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용마산에서 아차산까지 계속 강물을 따라 멋진 전망대가 이어진다. 서울둘레길에서 만나는 계곡과 크고 작은 하천의 모든 물줄기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오직 한강이다. 우리 역사의 주무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나라들도 모두 한강을 향해 총력전을 쏟아부었다. 한강 일대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용마산과 아차산 산등성이 위에 수많은 보루가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다. 현재 망우산부터 용마산, 아차산 일대에 있는 17개 보루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고, 이 중 10개가 고구려의 군사시설로 밝혀졌다.

용마산과 아차산 정상은 둘레길에서 조금만 다리품을 팔면 쉽게다다를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러나 조망이 목적이라면 보루 위에 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용마산 둘레길에서 마주 보이는 아차산 4보루는 암사대교 쪽 한강과 건너편 검단산 줄기까지 탁 트인 전망도 뛰어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보루 자체로도 아름답다.

용마산에서 바라보는 아차산의 보루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워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서로 다른 봉우리와 봉우리사이에는 항상 골이 있기 때문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 하는 게 산의 이치다. 두 산이 만나는 안부에서 중곡동 쪽으로 내려가는 골짜기는 긴고랑계곡이다. 이름처럼 길고 서늘한 긴고랑길에는 녹음이 짙고, 산마루 보루 위에는 창창한 햇살 아래망초와 금계국이 한창 빛나고 있다.

초여름의 뜨거운 보루는 평화로운 산상화원처럼 고즈넉하지만, 1,500여 년 전에는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까지 갖춘 전시용 건축물들이 여럿 있었다. 산 위에 높은 성벽을 세운 백척간두 보루 위의 삶은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아차산의 보루들은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게 다시 한강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치열했던 시절을 읽는 사료들이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고구려정



보루 남쪽으로는 원래 한강의 주인이었던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 암사동과 천호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차산 둘레길은 4보루에서부터 네 개의 보루를 차례로 지나고 나면 비로소 산길을 내려간다. 구석구석 눈길을 끄는 아차산의‘명품 소나무’들이 있지만, 워낙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길이라 뿌리가 드러난 것들도 많다. 사람의 길이 산의 원주민들에게는 얼마나 반갑지 않을까 생각하면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마지막으로 산등성이 끝에 있는 고구려정에 들러 잠시 쉬어본다. 실제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아차산 일대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는 475년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의 목을 베고부터 551년 나제동맹군에게 패할 때까지다. 아차산이 태어난 아득한 역사에서 고구려의 호시절은 한여름 밤 꿈처럼 짧다. 그럼에도 산마루에 고구려정이란 현판을 내걸고 들머리 공원 입구에 온달과 평강공주 동상까지 세운 것을 보면, 우리 안에 고구려로 대변되는 대륙을향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아차산을 내려온 둘레길은 광나루에서 드디어 한강을 건너게 된다. 오늘 광나루 앞을 지나던 강물은 다시 3코스를 시작할 때는얼마나 먼 곳에 다다랐을까.

김선미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이야기들을 꾸준히 책으로 쓰고 있다.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외롭거든 산으로 가라>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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