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개화기에 들어서며 우리 사회는 교육에서부터 교통, 통신,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서양 문물을 수용하게 됐다.
그 가운데에서도 의식주의 변화는 삶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른 적응을 요구했다.
상류사회부터 입기 시작한 서양 의복은 1895년 공식적인 의복제도로 인정받으면서 1900년대 초 최초의 조선인 양복점을 등장시켰다.
이후 기성복이 대세를 이루는 20세기 말까지 맞춤양복은 전성기를 누리며 역사의 한쪽을 장식했다.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함께한 양복점이 바로 ‘종로양복점’이다.
과거 기성양복이 없던 시절, 정장이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와 함께 맞추러 가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양복은 날개’라는 말을 하듯 고객들에게 꼭 맞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맞춤양복에만 평생 공을 쏟아 온 재봉사가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이경주 대표다.
원래 종로양복점은 보신각종 근처에 있었다. 조부였던 창업주 이두용 씨가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1916년에 세운 것이다. 가게의 이름도, 상징도 모두 근처에 있는 보신각종의 종을 모토로 했다. 당시에는 양복에 대한 수요가 부족해 주로 교복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개성과 함흥에 분점을 내고 한때 종업원 수가 2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조부는 양복 만드는 솜씨만큼 뛰어난 마케팅 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 온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을 비롯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면서 정치가로 잘 알려진 김두한 등 장안의 많은 유명 인사가 이곳에서 양복을 맞추었다고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2대째 가게를 이어받은 부친 이해주 씨 역시 한국 양복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 공로로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3대째 이경주 대표가 종로양복점을 이어받았다. 그의 양복점 시기는 곡절도, 변화도 많았다. 시위가 많아 최루탄 가스가 거리를 메울 때는 양복점 문을 닫고 피신도 했고, 때로는 가게 안으로 도망 온 학생들을 뒷문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위협적인 것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잠식해 온 대기업 기성양복의 공격이었다. 맞춤양복의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고, 주변에 있던 양복점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현실을 말해주듯 종로양복점도 창업했던 자리를 떠나 광화문 주변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을지로로 이사를 왔다. 곧 창업 100주년을 맞는 종로양복점은 그 어느 가게보다도 묵직하게 서울을 말해주는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가게 스케치를 마치고, 건물을 나와 을지로 거리에 섰다. 도로는 차들로 정체를 이루고, 많은 이들은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바쁘게 오간다. 난 그들 뒤로 올려다보이는 커다란 건물의 많은 창들 사이에서 ‘종로양복점’이란 글자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창틀에 걸어 놓은 양복은 분주한 을지로 거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시간을 어루만지는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일 년에 경조사가 있는 날에만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양복을 꺼내 입는 그림쟁이에게 맞춤양복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학교를 졸업할 10여 년 뒤에는 함께 양복을 맞추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도 더 된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울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가장 잘맞는 근사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졌다.
글 · 일러스트 이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