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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

피맛골>
2016.03

문화

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시절②_여기가 좋겠네

피맛골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건축물과 장소를 소개합니다.
서울 시민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한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과 대화해보세요.


여봐라, 길을 비켜라

피맛골, 말[馬]을 피[避]하기 위해 만든 곳[洞]이라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누구 이름이냐고요? 바로 600여 년 전부터 종로 뒷골목을 지켜온 나를 칭하는 것이지요. 나는 하관(下官)이 길을 가다 상관(上官)과 마주치면 숨어 들어오는 뒷길이었습니다. 내가 생겨난 조선 시대만 해도 아랫사람은 상관이 지나가는 동안 말에서 내려 길에 엎드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하나 바쁘게 길을 가던 중이라면 굳이 멈춰 기다리지 않고 뒷골목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만일 테죠. 상관중 몇몇은 자신의 지위를 뽐내려 일부러 천천히 길을 지났기 때문에, 매번 엎드려 기다려야 하는 사람 입장에선 참 속 타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로 큰길 안쪽으로 말 한 마리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을 만들었고 그게 바로 나, 피맛골이 생겨난 연유입니다.


여기가 좋겠네

나는 종로와 나란히 놓였습니다. 종로1가에서 종로6가, 즉 광화문부터 동대문까지 종로 큰길을 사이에 두고 양 뒤편을 연결하는 길이었죠. 하관과 일반 서민이 자주 다니다 보니 내 몸을 따라 작고 소박한 상점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목로주점과 모줏집 등 반주를 하는 국밥집이 인기를 끌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온통 선술집으로 꽉 들어찼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달랠 길 없는 이들을 위해 나는 마땅히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네들은 행여나 큰길로 지나는 일본 고관이 들을까 마음껏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벌겋게 취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땅에 처박힐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동이 틀 때쯤이면 남은 몇몇은 해장술을 하고 비틀거리며 선술집을 나섰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길고 애달픈 하루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땐 그랬지

1940~1950년대에는 해장국집이 성행했습니다. 청진동 해장국, 지금에야 나를 알게 된 젊은 친구들은 나를 해장국 골목으로 알 만큼 유명한 해장국집이 많았지요. 1960년대 초반에는 낙지 요릿집이 들어섰습니다. 술 내음으로 가득하던 시기가 지나고 얼큰한 해장국 향이 풍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매콤한 낙지 냄새가 골목을 따라 솔솔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근처 무교동에서 명성을 날리던 ‘서린낙지’가 내게 오더니, ‘이강순실비집’이 생겨나면서 낙지 골목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또 빈대떡, 막걸리, 생선구이 등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것들도 있었지요. 특히 빈대떡으로 유명한 ‘청일집’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생겨나 돈 없는 문인이나 언론인 등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되곤 했습니다.

1. 일제강점기 당시 종로대로. 큰길 안쪽으로 좁은 피맛골이 나란히 나 있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주소 종로구 종로19, 종로구 삼일대로,종로구 수표로(성당약국~피카디리 극장 골목),
종로구 돈화문로 문의 종로 1·2·3·4가동 주민센터 (02-2148-5242)
2. 1870~1900년대로 추정되는 피맛골 음식점의 모습.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3. 빈대떡을 팔던 ‘청일집’ 벽에 그려놓은 그림.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4. 빈대떡을 팔던 ‘청일집’ 벽에 그려놓은 그림.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5. 2009년 서울시 재개발 계획으로 피맛골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
좁은 골목에 선술집, 낙지 요릿집 등이 빼곡히 들어섰다.
출처: 종로구청 홍보과


상전벽해(桑田碧海)

시간이 지나며 내 소문을 듣고 높으신 양반들도 이 뒷골목을 찾아왔습니다. 가게는 대부분 비좁아 서너 테이블만 돼도 꽉 들어찼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 사이에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때면 이 시끌벅적한 골목도 고요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몇백 년을 산 내가 심심치 않게 세월을 보낸 것은 갖가지 사연을 들고 찾아온 이들 때문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 배 아픈 김 씨, 좋아하는 여학우에게 차이고 눈물 그렁그렁해진 이 군 등 삶이 담겨 있는 시시콜콜한 얘기 하나하나가 정겨웠습니다. 이런 재미가 줄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종로 남쪽에 위치한 내 몸 중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남은 절반인 북쪽도 도시 개발에 밀려 점차 한두 토막씩 내어주다 보니 내 몸은 뚝뚝 끊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종로 일대가 재개발되기 시작했고 ‘한일관’ 등 터줏대감이 다른 동네로 떠나며 이젠 내가 거의 사라졌다 싶을 만큼 줄어들었고요. 결국 나를 찾는 이들도,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들게 되었죠.


운수 좋은 날

사람들은 옛 정취가 묻어나는 가게를 찾아온 것인지, 그런 가게들이 떠나고 텅 비어버린 낡고 후미진 골목을 찾진 않았습니다. 유명하던 가게들은 나를 떠나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좁은 피맛골을 벗어나 크기가 어마어마해진 친구도 있고, 작고 소박한 맛이 있던 주점은 다른 곳에서 멋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재개발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가차 없이 나를 떠난 녀석들이 얄밉고 서운했지만, 한편으론 살자고 떠났는데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잘려나간 내 허리만큼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요즘 서울 시민들이 내 몸 중 남은 일부와 추억을 지키려고 해주어 고맙습니다. 개중에는 현대식 건물에 속하여 새롭게 바뀐 곳도 있고, 재개발이 취소되어 살아남은 부분도 있습니다.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입니까?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글 김승희 자료 제공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박물관, 종로구청 홍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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