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우리 삶을 관통하는 여러 명제는 늘 밥을 끌고 온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밥값이나 벌어야지, 밥줄이 끊긴다, 밥은 먹고 다니냐…. 심지어 ‘밥걱정’이란 구(句)는 맞춤법 규정상 붙여 쓴다. 하도 많이 써서 하나의 고정된 낱말이 된 셈이다. 밥은 그래서 슬프다. 밥이 모자라던 시기의 기억인 것이다. 이제는 ‘밥=화폐’다. 밥은 충분해졌지만 먹는 일의 고난은 영원할 것이다. 그 고난에 늘 밥이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밥을 벌기 위해 다시 세상에 나온다.
밥이 얼마나 우리에게 벅찬 문제였는지, 아예 다른 곡식도 다 밥으로 불렀다. 보리도 보리쌀, 조도 좁쌀이라는 별칭이 되었다. 쌀은 돈과 동일체였고, 세금도 쌀로 받았다. 돌아가신 고모부의 부고를 듣고 몹시 슬펐다. 그분의 자상함이 내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는 까닭인데, 너무도 배고프던 어느 시기에 그분이 쌀 한 가마를 보내주신 것이다. 돈 얼마를 보내셨으면 그리 기억에 남았을까. 아닐 것 같다. 쌀은 그 자체의 부피와 무게감이 구체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자라던 시기에는 그랬다.
밥맛을 좌우하는 쌀 이야기
옛날, 그러니까 내 고모부가 쌀을 보내신 40년도 더 지난 시기에는 밥의 품질이 이원화되어 있었다. 아주 맛있거나 형편없거나. 그건 쌀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부족한 쌀을 증산해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나온 게 통일벼, 유신벼다. 하지만 이 벼를 심지 않는 농민이 많았다. 밥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중에는 정부미(주로 통일벼)와 일반미라는 두 가지 쌀이 팔렸다. 돈이 있으면 일반미를 먹고, 없으면 정부미를 먹었다. 정부미라도 넉넉히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던 시절이었으니까 배고픈 민중은 대체로 큰 까탈 없이 수용했던 것 같다. 통일벼가 맛이 없던 데는 사유가 있다. 증산을 목표로 개발한 벼이므로 잘 쓰러지지 않고, 낟알이 많이 달리는 벼를 육종해야 했다. 이때 ‘인디카(Indica)’ 계열의 쌀과 유전적으로 섞어 육종했더니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푸석푸석하고 날린다는 표현을 쓰는 남방계 인디카 쌀의 특성이 통일벼에 깃들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자포니카(Japonica)라는 쌀을 좋아한다. 밥을 지으면 찰기가 있고 쫄깃하며, 윤기 나는 품종을 애호한다. 흥미로운 건, 동남아 쪽 사람들은 자포니카종을 맛없는 쌀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자포니카종 쌀을 먹는 곳은 한국, 일본 말고도 몇 지역이 더 있다. 미국, 중국 북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다. 미국쌀은 한국에서 독특한 대접을 받았다. ‘미제’가 최고이던때, 미국 쌀도 아주 귀한 대우를 받았다. 미군 부대로 들어온 쌀이 어찌어찌 시중에 나와서 인기가 있었다. 요즘은 정식으로 수입하는데,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한국 쌀이 맛있어서 그렇다. 옛날에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미국 가면 쌀이 없어 어떡하나’였다고 한다. 빵만 먹고 어찌 사느냐고.
향수를 달래주던 밥
이탈리아에 간 게 20년도 넘었다. 이탈리아는 서양이니까 쌀이 없을 줄 알았다. 쌀을 한 말 싣고 온 어떤 유학생을 직접 본 적도 있다. 나도 쌀 두 되쯤 가지고 갔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는 좋은 쌀이 나오는 나라다. 그것도 한국처럼 자포니카종, 즉 쫄깃하고 윤기나는 쌀이 있다. 이탈리아 식당에 가면 리소토라는 음식을 판다. 다들 알 것이다. 이걸 만드는 쌀이 바로 한국 쌀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쌀 품종이 ‘짓는 밥’에 적합하지는 않다. 좀 딱딱하고 길쭉하다. 그래서 아주 곱게 도정했다는 ‘수퍼 피노(수퍼 파인)’이라는 제품을 구하러 다녔다. 이것이 한국 쌀과 아주 유사하다. 밥을 지으면 윤기가 흐르고 맛있다. 혹시라도 이탈리아 여행 중에 쌀을 구하려면 참고하길.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쌀과 관련한 해프닝이 또 있다. 고속도로를 달려 어딘가로 가던 중 휴게소에 들렀다. 한국처럼 기름도 넣고, 밥도 먹을 수 있다. 뷔페식당이 있는데, 쭉 둘러보니 볶음밥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선택하고 데워달라니까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하는데,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식은 거라도 먹자, 생각하고 한 술 뜨니 볶음밥도, 비빔밥도 아닌 묘한 맛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샐러드다. 말 그대로 쌀 샐러드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 이름도 ‘리소토’라고 하지 않고 ‘리소 샐러드’라고 한다. 리소토는 쌀로 만든 요리 이름이고, 리소는 쌀을 뜻한다.
이제 밥 그 자체, 끼니 걱정은 안 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밥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나면 손님이 알아서 많이 가는 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겠다. 갓 지은 밥을 낸다는 광고를 하는 식당도 많아졌다. 1인분씩 솥밥을 지어내는 기계도 출시되어 팔린다. 가격이 상당히 비싼데도 반응이 좋다고 한다. 밥다운 밥을 먹고 싶어 하는 대중이 많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진지 드셨습니까?” “밥은 먹고 다니냐?” 밥이 흔해진 지금도 우리는 밥을 이야기한다. 밥은 위대하고, 실존적이다. 그렇다.
박찬일 셰프의 집콕 레시피
이탈리아식 쌀 샐러드
재료(2인분 기준)
쌀 160g,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2컵, 빨간 파프리카 잘게 썬 것 1/2개분, 양파 다진 것 2큰술, 마늘 다진 것 1작은술, 올리브 5개, 선드라이 토마토 5개(방울토마토로 대체 가능), 케이퍼 20개, 캔참치 2큰술, 파르메산 치즈 덩어리 50g, 바질 또는 이탈리아 파슬리 약간, 반숙 달걀 1/2,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① 냄비에 물을 많이 붓고 바닷물 농도로 소금을 넣어 팔팔 끓으면 쌀을 넣는다.
② 가끔 저어주며 15분간 익힌 후 건져서 체에 밭쳐 식힌다(씻지 않는다).
③ 선드라이드 토마토는 가늘게 썰고, 캔참치는 다진다.
④ 파프리카와 양파, 마늘 다진 것을 올리브유에 살짝 볶는다.
⑤ 모든 재료와 삶은 쌀을 섞고 올리브유를 고루 뿌려 섞는다.
⑥ 소금과 후춧가루를 넣어 간을 한번 보고 파르메산 치즈를 져며 얹는다.
⑦ 바질이나 이탈리아 파슬리를 다져 얹고 달걀을 더한다.
글 박찬일 사진 이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