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떡을 유달리 좋아했다. 1924년에 이용기가 처음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많은 요리가 나오는데, 떡만 해도 72가지다. 시루떡, 팥떡, 쑥떡, 백설기, 두텁떡 등 우리가 현대에도 먹고 아는 떡이 많이 나온다. 떡이 얼마나 일상이었으면 떡을 소재로 한 속담, 일화, 전설, 설화도 무수하게 많을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같은 옛이야기의 대사를 들으며 우리는 자랐다.‘급히 먹는 떡이 체할까 봐’ 어머니가 마련해준 떡을 천천히 먹으면서.
떡 치는 소리에 담긴 추억
어릴 적 떡의 기억은 무수하다. 나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어머니에게 “커서 술을 좋아할 게 틀림없다”는 핀잔을 들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 되었다. 설은 물론이고 온갖 명절은 떡 잔치였다. 아기 백일과 돌에도 떡이고, 환갑·칠순 잔치에도 떡, 결혼 잔치에도 떡, 제사에도 떡, 이사하거나 인사하러 가도 떡, 떡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떡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사 온 집에서 가져다주는 시루팥떡이나 어느 집 아기 백일잔치에서 나오는 백설기가 좋았다. 시루팥떡은 찹쌀로도 만들 수 있는데, 입에서 쫀득하니 씹히는 것이 기막혔다. 백설기는 잔치에서 얻어온 것이 나중에는 굳어버리는데, 한 번 더 찜통에서 찌면 맛이 다시 살아났다. 푸슬푸슬한 떡이 부스러지는 식감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설 무렵에는 동네에서 실제로 떡 치는 집이 꽤 있었다. 미리 시장의 떡집에 쌀을 맡기고 공임을 주어 얻는 가래떡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떤 집은 아예 마당을 열어놓고 집 안 장정이 떡을 쳤다. 떡메를 한 번 치면 조수가 손에 물기를 묻혀서 반죽을 한 번 주무르고, 다시 떡메질이 이어졌다. 대개 찰떡을 만들 때 많이 쓰는 방법인데, 멥쌀도 그리 쳤다. 아마도 떡을 직접 만들어 먹던 명문가의 관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울 떡의 성지, 낙원동
어린 시절에는 시내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운니동에서 낙원동, 종로로 이어지는 골목이 내 놀이터였다. 지금은 아귀찜집이 많지만 당시에는 거의 없었고, 거개가 떡집이었다.
흔히 ‘낙원동 떡전골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이니 당시만 해도 떡을 많이 먹고 온갖 행사에도 많이 쓰는지라 주문이 왕성했으며, 떡전에는 윤기가 흘렀다. 종로는 조선 시대부터 육의전과 그에 부속된 온갖 점방이 있던 곳이라 떡전도 자연스레 형성되었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1946)은 문자 그대로 문답 형식으로 우리 민족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낸 책인데, “떡 이야기를 해주시오”라는 질문으로 답이 나와 있다. 이에 대해 육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떡의 종류가 많고 또 솜씨 좋기로는 서울만 한 데가 없으며, 첫째 대궐을 갖고 있고 크나큰 집들이 솜씨를 경쟁하는 데서 저절로 발달한 것입니다….”
한때는 쉰 곳이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위세가 크게 줄었다. 떡을 맞추는 사람들의 풍속이 거의 사라졌고, 거주민의 강남 이주 등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그래도 여전히 낙원동은 떡을 팔고 있어서 옛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 설 무렵에는 동네에서 실제로 떡 치는 집이 꽤 있었다. 어떤 집은
아예 마당을 열어놓고 집안 장정이 떡을 쳤다.”
새해를 시작하는 절기식, 떡국
떡국에 쓰는 떡은 가래떡이다. 멥쌀을 쳐서 둥글고 길게 빚은 후 한번 굳혀서 엽전처럼 썰어 끓인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 떡국이다. 현대에 와서도 떡국은 식당의 주요 메뉴였다. 어렸을 때 서울 장안의 유명 한식당에서는 거의 떡국이나 떡만둣국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0년대 후반, 지금은 사라진 ‘스카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이웃한 ‘진고개’ 식당에서 떡만둣국을 먹었다. 지금도 이 가게는 떡만둣국을 판다.
흔히 가래떡을 엽전처럼 써는 것을 재물을 바라는 기복행위로 연결 짓곤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유럽에서는 소시지를 동전처럼 썰어 렌틸콩과 함께 넣고 끓인 수프를 연말연시에 먹는데, 이를 재물복으로 본다. 중국에서도 동전을 둥근 만두에 넣고 빚은 후 그걸 발견한 사람에게 큰 재물운이 있다는 식으로 기복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산둥 출신 화교 요리사에게 어린 시절의 경험이라며 직접 들은 것이다.
떡은 밥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다. 윤서석의 책 <한국음식-역사와 조리법>에는 한반도에서 개발된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정확하게 언제 떡이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신석기시대 후반기에 이미 잡곡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곡물을 갈아 찌는 시루가 청동기 유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 이미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떡은 원료인 곡물보다 단맛이 나고 식감이 좋으며, 보존성도 뛰어나 오래전부터 사랑받아왔다. 다만 찧어서 압축하게 되므로 부피가 줄고 헤프다는 단점이 있어 아무나 만들어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떡은 밥이나 죽이 아닌 다른 형태의 ‘곡물 음식’을 총칭했다. 그래서 서양에서 빵이 들어왔을 때 한동안 ‘양병(양떡)’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제 서울의 떡전은 고급화되어 아예 백화점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래시장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밀가루 음식인 빵과 경쟁하면서 과거의 영화를 잃어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절미, 쑥떡, 절편, 바람떡, 수수팥떡, 가래떡…. 어려서 먹던 떡의 역사가 오래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경이로운 떡집 #서울떡집
1910년 이후 궁 밖으로 나간 수라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종로구 낙원동에서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쌀로 만든 귀한 먹거리, 궁중 떡의 제조 비법은 떡의 인기에 힘입어 널리 퍼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낙원동 하면 떡이 떠오를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낙원동에서 여전히 맛있는 떡을 빚는 떡집을 찾았다.
이곳의 역사는 무려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라간 상궁에게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운 고이뽀 증조할머니를 시작으로 대대로 떡을 빚어 현재 4대째에 이른다. 주재료인 쌀을 비롯해 콩, 호박같은 부재료도 최대한 최상급을 쓴다. 전통 방식을고수해 만든 40여 가지의 떡은 남녀노소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중 제주도 한라산에서 자란 생쑥을 넣은 쑥 인절미는 진한 향과 쫄깃한 식감으로 사랑받고 있다.
원조낙원 떡집
1949년 조선왕조 마지막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인 한희순 상궁에게서 전통 궁중 떡 제조 비법을 배운 홍간난 할머니가 만든 떡집. 타고난 손맛에 비법이 더해지자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고, 그 비법을 조카 그리고 조카의 아들이 물려받아 현재 3대째 이어오고 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 그대로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제대로 된 손맛이 느껴진다. 인공 첨가물 없이 천연색소만을 사용하는 귀한떡은 선물이나 답례품으로 인기가 높다.
비원 떡집
2010년 신용일 셰프가 ‘전통 떡에 생기를 더한다’는 신념으로 한국의 떡 문화를 알리기 위해 문을 연 곳이다. 프랑스에서 배운 제과 기술을 떡 제조에 적용해 전통을 지키면서도 색다른 맛의 떡을 선보인다. 바람떡, 시루떡, 주악 같은 기본 떡은 물론이고 초콜릿 시루떡, 카스텔라 인절미, 유자 약과 같은 떡 종류가 눈길을 끈다. 엄선한 재료로 당일 아침 정성껏 만든 떡만 판매하며, 겨울철 별미 메뉴인 하얀 단팥죽과 감각적인 떡 선물 세트도 추천한다.
병과점합
글 박찬일 취재 김시웅, 진주영 사진 이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