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의 영원한 짝꿍은 국물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나온 건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탕반이나 국밥 문화는 오랜 언급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국 없이 밥 못 먹는다는 사람은 외국에선 거의 만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나는 20년 전 유럽에서 요리 공부를 했는데, 괴로움의 절반은 국물 없는 음식 문화 때문이었다. 수프가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있다가도 없는 국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국이 아니었다. 뜨겁지도 시원하지도 않았으며, 일상의 식사에 수프가 나오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자라면서 쌓이는 밥상머리 기억은 워낙 선명한 법인데, 다른 건 별로 기억이 안 나도 어느 날의 밥상은 너무도 세세하게 기억이 난다. 한겨울이었을 것이다. 검은콩자반,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들어간 콩나물 그리고 동태찌개 같은 것이었다. 검은 내장 막과 굵은 가시가 있는 가슴살 부위를 즐기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물론 그 부위는 나도 어른이 되면서 최고로 좋아하게 되었고, 빨간 국물이 입을 적시고 위를 뜨끈하게 만들던 기억도 난다. 말하자면 찌개가 마음에 드는 날은 가족들도기쁘고 흡족했으며, 안온했다. ‘행복’ 같은 추상어가 실존이 되는 찌개가 있던 밥상이었다.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도 국과 탕 요리를 꽤 자주 먹지만, 한국인처럼 상에 붙박이로 놓는 건 못 봤다. 그 나라의 어머니는 ‘날씨가 추우니 냄비 요리를 해야지’ 정도가 아닐까. 반면 우리는 요즘 말로 계절 불문 ‘밥상의 기본’이었달까. 한여름이라 더운 국물을 먹기 싫으니 ‘냉국’을 만들어 올려야 했으니까. 우리가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관습도 어찌 보면 최소한 국 역할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먹고 나눠 먹는 국과 탕
한국이 탕반에 거의 식생활의 핵심을 맡기게 된 것은 단순히 지리적·역사적 영향으로 보기엔 너무도 복잡한 흐름이 있었을 듯싶다. 아마도 장이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장과 재료를 넣고 끓이면 감칠맛이 나고, 양이 넉넉해져 순간일망정 포만감이 생긴다. 장은 여러 가지 채소와 건더기감을 어우러지게 해서 많은 양을 만들어내고, 다수가 나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늘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과거의 관습이 우리 식생활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먹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먹지 않던 것도 먹어야 했던 기근의 시대에는 거친 재료를 푹 고아 탕으로 퍼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탕은 본디 다중용 식사다. 농경사회의 공동 식사, 부족한 연료가 많은 국과 탕을 끓이도록 만들었다. 그 관습은 농경사회가 해체된 후에도 유전자로 우리 몸에 남았다. 인스턴트 라면이 초기의 부진을 딛고 한국을 상징하는 초대박 음식이 된 건 얼큰한 국물 덕분이었다. 일요일엔 짜파게티 요리사가 있을지 몰라도 일상에서 최고는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을 동반한 탕면, 바로 라면이었다.
수프 같은 국물 대용으로도 볼 수 있는 카레에도 국물을 따로 먹는 한국인이다. 카레의 발상지인 인도나 그것을 변형시킨 영국, 일본 그 어디에도 반드시 국물을 곁들이는 카레는 없다.
찌개가 마음에 드는 날은 가족들도 기쁘고 흡족했으며, 안온했다.
‘행복’ 같은 추상어가 실존이 되는 찌개가 있던 밥상이었다.
탕·국·찌개로 대동단결
우리는 정말 국과 탕의 민족이다. 그런 경향이 줄기는커녕 시대가 흐르면서 더 커진다. 찜을 시켜도 탕처럼 나온다. 조림도 탕인지 조림인지 알기 어렵다. 수육도 탕 국물에 넣어서 나온다. 수육의 물 수(水) 자는 삶았다는 뜻이지 국물이 많게 낸다는 게 아니다. 이것은 2000년대 이후의 변화다. 탕은 걸쭉한 소스처럼 졸게 되는데, 이는 비빔밥 또는 볶음밥으로 진화했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냈다.
김치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변용이 많은 저장 음식일 것이다. ‘국뽕’이라 해도 좋다. 김치 하나가 수백 가지 음식으로 변한다. 그중 어찌 찌개를 뺄 수 있을까. 김치를 가지고 요리한 음식 중 찌개는 일단 큰 지분을 가진 존재다. 넣는 재료에 따라 수십 가지로 분화하며, 심지어 농축 정도로 ‘짜글이’라는 신형 음식까지 파생시켰다. 아아, 정말 김치의 나라답다.
찌개는 서울의 모세혈관 같은 골목길로 퍼져나갔다. 적어도 1960년대는 찌개 전성시대를 알리는 시기였다. 전골이라는 외래에서 유래한 냄비 요리도 한식집의 주력 메뉴로 등장했다. 이제는 생소한 섞어찌개도 1970~1990년대를 풍미한 핵심 메뉴였다. 해물탕이라고 하는, 인천에서 온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찌개가 1980년대에 서울 부도심을 휩쓸었고, 감자탕과 경쟁했다. 25도짜리 독한 소주의 기운을 씻어내고, 허술한 배를 빨리 채우려면 찌개만 한 게 없었다.
당시의 ‘육수 추가’ 문화도 경쟁적으로 퍼졌다. 부족한 주머니 사정에 국물이라도 더 먹자는 생존 전술이었다. 국수나 우동 사리, 두부 추가로 시작해 일례로 부대찌개에는 온갖 햄과 소시지 추가 메뉴가 생겨 ‘사리 추가’의 어떤 상징이 되었다. 원래 사리는 국수류를 추가 주문할 때 부르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재료에 사리를 붙여 말한다. 소시지 사리, 떡 사리….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뭐니 뭐니 해도 뜨거운 국과 보글보글 끓여내는 찌개는 겨울 음식이다. 한여름에 땀 흘리며 찌개를 나눠 먹던 기억보다는 손 부벼가며 먹을 정도로 외풍 들이치는 싸구려 찌개집의 그 정서가 제격이었다. 찌개의 시대, 탕의 서울이여. 아마도 우리의 기억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음식이 될 터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한 그릇
캬~ 시원하다!
영혼을 채우는 #탕·국·찌개
한 가지 음식으로 세대를 이어 내려온 것만으로도 분명 의미 있다. 그중에서도 1932년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용금옥은 소 곱창을 우려 만든 육수에 유부, 두부, 버섯 등과 함께 깨끗하게 손질한 미꾸라지를 넣어 끓여낸다. 미꾸라지가 통째로 들어가는 서울식 추탕이 낯설다면 갈아달라는 주문도 가능하지만, 제대로 몸보신을 하려면 서울식으로 맛보기를 추천한다.
용금옥
대구는 타우린이 풍부해 술 마신 다음 날 해장 음식 소재로 손꼽는다. 특히 이곳의 대구탕은 깨끗하게 손질한 대구 뼈와 무, 파 등을 넣어 깊고 맑은 육수를 낸 뒤 주문이 들어오면 신선한 대구 살과 곤이를 넣어 끓여낸다.
마치 설렁탕의 깊은 맛을 생선으로 표현한 듯한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 양념을 더해 얼큰하지만 뒷맛은 개운한 매운탕도 인기다. 낚시광인 사장님 덕분에 운이 좋다면 생대구 메뉴도 맛볼 수 있다.
춘자대구탕
다양한 종류의 햄과 양배추, 감자, 양파, 대파가 듬뿍 들어가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을 이루는 부대찌개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찌개 메뉴다. 그중에서도 전골 형태로 끓여 먹는 기존 부대찌개와 달리 진한 사골 육수에 김치를 넣지 않는 ‘이태원식 부대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이곳은 바로 먹기 좋도록 주방에서 끓여낸다.
주문 후 기다리는 동안 달걀프라이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바다식당
대를 이어 음식 장사를 하는 데는 자부심과 더불어 좋은 음식을 손님에게 내겠다는 사명감도 따른다.
원조를 뛰어넘는 ‘태조’라는 의미를 담은 가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6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맛있는 밥을 제공하는 백반집에서 찌개가 맛있는 집으로 인정받으며 선보인 감자국(감자탕)을 단일 메뉴로 앞세운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온 가족의 외식 메뉴로 사랑받는 감자국은 국산 돼지 등뼈와 감자를 넉넉하게 담아낸다.
태조감자국
어묵이 수북이 올라간 김치찌개로 유명한 이곳은 간판이 없다기보다는 식당의 이름 없이 ‘김치찌개·칼국수·콩국수 전문’이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지만 실제 메뉴는 ‘김치찌개’ 한 가지다. 모든 식자재는 국내산으로만 사용하며, 인원수만큼 어묵 사리를 추가하는 것이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개운한 국물 에 푹 익어 시큼한 김치와 얇은 어묵이 단순하지만 계속 입맛 당기는 깔끔한 김치찌개를 완성한다.
김치찌개집
글 박찬일 취재 김시웅 사진 한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