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와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도시, 서울.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는 어제의 서울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서울은 이야기가 넘치는 도시다. 오랫동안 나라의 수도였고, 그만큼 거대해 저 위부터 저 아래까지 다양한 모습이 공존한다. 특히 지난 100여 년 동안 서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었다. 서울의 경계는 확장되고, 여러 건물이 허물어지고 새로 들어섰으며,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그렇다고 어제의 서울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다행히 서울에 쌓인 기억을 간직한 장소들이 남았다. 무엇보다 서울을 기록한 문학작품이 있다. 작가가 재구성한 소설 속 한 장면 한 장면은 서울의 한 시절을 보여주는 현미경과도 같다. 역사책 아닌 역사책이다.
서울시는 근현대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의 삶을 담은 문학작품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해 기념하고 있다. 소설·시·희곡을 아우르는데, 최근 나도향의 <어머니>, 최서해의 <전아사>, 하근찬의 <전차 구경> 등 소설 3편이 더해져 총 26편의 작품이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올랐다. 그중 세 작품을 골라 소개한다. 각 시대 속 서울을 잘 드러낼 뿐 아니라 영원한 고전이라 부를 만한 작품들이다.
서울미래유산
서울시는 미래 세대에 전할 가치가 있는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발굴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보전을 지원해오고 있다.
서울미래유산은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고루 수렴해 조사와 심의를 거쳐 선정한다.
한국 문학사상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변주되었을 주인공 구보 씨. 스물여섯 살이던 1934년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한 박태원은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감독 봉준호의 어머니 본가 쪽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중반의 박태원과 21세기 초반의 봉준호. 그들의 작품은 일상을 치밀하게 관찰해 찾아낸 소재로 시대를 꿰뚫는, 즉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지식인 ‘룸펜’ 구보가 정오 무렵부터 새벽 2시까지 서울 거리를 걷고 전차를 타고 어딘가에 앉아서 생각하고 타인을 관찰한 14시간을 다룬 소설이다. 겨우 그 14시간이 나라를 잃은 1930년대 지식인 계층의 일상, 생각, 고뇌, 관심사를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그는 집을 나와 청계천 광교로 걸어간다. 일찍 들어오라 이르던 어머니에게 “네” 하고 대답 한 번을 못한 자신을 후회하는 동안 걸음은 광교에 다다른다. 어머니의 걱정을 알면서도 대답을 주저하는 청년의 모습이란 21세기 우리에게도 얼마나 익숙한가.
하릴없는 걸음은 이어진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향하는 광교, 종로 네거리, 경성역, 화신상회가 손에 잡힐 듯하다. 2020년의 서울에서 그의 걸음을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걷기란 빽빽한 일상에 여백과 성찰을 선사하는 법. 구보가 고독하게, 결국은 희망을 다짐하며 바라본 곳곳이 건재하다. 문화역서울284가 된 경성역, 서울도서관이 된 경성부청, 한국은행화폐박물관이 된 조선은행 등이다. 그때처럼 지금도 서울은 산책자의 도시, 걸을 때 이야기가 들려오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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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서울미래유산 소설 <날개>
박태원과 이상은 ‘짝패’라 불릴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벗으로 등장한 이가 바로 이상이고, 이 소설이 신문에 연재될 당시 이상이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상이 1936년에 발표한 <날개> 는 일제강점기의 경성과 사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소설이다. 여기서도 경성역, 미쓰코시 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등이 주요 배경이다.
전쟁은 도시와 사람을 할퀸다. 오늘날의 말끔한 서울에서는 70년 전 발발한 한국전쟁의 기미가 읽히지 않지만, 문학은 수도로서 아프게 전쟁을 치러낸 서울을 기억한다. “번화가인 충무로조차도 어두운 모퉁이, 불빛 없이 우뚝 선 거대한 괴물 같은 건물들 천지였다. (중략) 중앙우체국처럼 다 타버리고 윗구멍이 뻥 뚫린 채 벽만 서 있는 집들, 이런 어두운 모퉁이에서 나는 문득문득 무섬을 탔다.” 1931년 태어난 박완서는 만 스물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쟁을 맞았다.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서울에서 생계를 위해 미군 PX 매장에 취직했다. 미군에게 애인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하라고 ‘영업’하는 게 업무였다. 실제로 스무 살의 박완서는 이 일을 했다.
주인공 이경은 전쟁 중에 두 오빠를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계동의 한옥에서 거주한다. 이경은 자식 둘을 잃은 상실감에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어머니의 텅 빈 회색 같은 모습이 안쓰럽고도 싫다. 벗어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다. 무지개처럼 색색이 피어날 인생의 가능성을 앗아간 전쟁 속 일상에 작은 떨림이 찾아온다. 매장의 초상화가 옥희도 때문이다. 국전에서 수상한 ‘진짜 화가’인 그도 전쟁 통에 여기까지 떠밀려왔다. 통통 튀는 청춘은 옥희도에게 슬며시 기대려 하고, 그들은 PX, 곧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가까운 명동 거리를 함께 거닌다. 좌절이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라면, 사랑하는 것 역시 존재의 본능. 전쟁도 청춘의 설렘을 막지 못한다. 21세기의 명동은 여전히 구경거리, 먹거리가 넘쳐나는 동네로 사람을 모은다. 옥희도의 모델이 된 박수근 화백이 붓을 잡았을 신세계백화점도 꼭 짚어야 한다. 위대한 화가가 저 한편에서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가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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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선, <오발탄>
박완서의 <나목>이 전쟁 중 서울시민의 모습을 담았다면, 이범선의 1959년 소설 <오발탄>은 서울에 이주해온 피란민 가족의 비극을 보여준다. 주인공 철호가 사는 해방촌은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이 빼곡한 피란민 동네였다.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감성을 깨우는 여행지로 유명해진 이 동네의 과거를 책과 함께 기억하자.
기술은 앞으로 나아간다. 때로는 기술의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을 서럽게 하기도 한다. 편리하다는 건 안다만, 편리함이 사람이 바라는 전부는 아니므로. 하근찬이 1976년 내놓은 소설 <전차 구경>은 지하철이라는 신기술이 등장한 직후 할아버지와 손자의 나들이 이야기다.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이튿날 아침, 조 주사는 손주 기윤이와 지하철을 타러 나선다. 처음 생긴 지하철은 서울시민에게 이토록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청량리에서 서울역까지 지하에 기찻길을 팠다니. 넓고 깨끗한 정거장, 지하철 천장에 즐비하게 매달린 선풍기, 폭신한 의자, 무엇보다 저 자동문!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문은 세상 신기한 구경거리다.
신나서 들뜬 손주와 달리 조 주사는 적잖이 씁쓸하다. 사실 그는 전차 운전수였다. 지하철보다는 느렸으나 전차시절에는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땡땡땡 하고 신호를 울리며 달리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전차가 지나가는구나 하고 웃었다.” 서울역에 내려 손주에게 남대문이 멋있지 묻자 곰팡내가 난다는 발칙한 대답이 돌아온다. 당시엔 1968년 운행을 종료한 전차 중 한 대를 남산 어린이 놀이터에 전시해두었다. 이를 보고도 손주는 큰 관심이 없다.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이 낡아간다. 소설 속 아홉 살 손주가 쉰다섯 중년이 되었을 지금, 서울은 어제를 기념하는 일의 소중함을 아는 어엿한 도시로 변모했다. 전차는 이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깨끗이 단장하고 관람객을 맞는다. 46년 사이에 서울 시내 전철 구간도 7.8km에서 300km 이상으로 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서울 전철은 도심과 교외 구석구석을 이어 전철을 이용해 여행하기도 편리하다. 시대는 바뀌어도 전철은 변함없이 서울시민의 친근한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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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서울은 만원이다>
이호철이 1966년 신문에 연재한 <서울은 만원이다>는 급변하는 서울이 배경이다. 하근찬의 <전차 구경>은 전차가 철거된 뒤의 이야기지만, 1960년대가 배경인 이 소설에서는 전차가 구시대의 막차처럼 등장한다. 서울 전체가 공사장이었던 1960년대엔 꿈을 좇아 또는 먹고 살기 위해 상경한 이가 허다했다. 주 무대인 세운상가와 종로3가 일대를 현재와 비교하니 실로 상전벽해다.
글 김현정 일러스트 한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