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혁명, 국수
아마도 연세 지긋한 어르신 세대에게는 국수가 목숨을 이어온 핵심 음식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수탈로 거의 파괴된 식문화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요한 변화 한 가지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밀가루 음식이다. 미국으로부터 구호 물품을 원조받으면서 갑자기 밀가루가 풍성해진 것이다.
“칼국수는 밀가루 대신 보릿가루로 해도 맛이 조흡니다(좋습니다). 이것을 밀국수 모양으로 얇고 넓게 펴서 두루두루 말어서….”(동아일보 1931년 7월 31일 자 기사 발췌) 밀가루가 귀하니 보릿가루로 칼국수 만드는 방법을 신문이 알려주고 있다. 문헌을 보면 온갖 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 밀가루가 넉넉했다면 조금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시대는 밀가루의 덕을 크게 보고 있다. 맛있는 국수를 값싸게 먹을 수 있으니까.
미국에서 밀가루 생산 혁명이 일어났고, 과잉 생산된 밀가루는 처치 곤란이었다. 심지어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그것을 일본과 한국 등에 제공하고, 나중에는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밀가루 음식사의 가장 큰 충격적 사건이었다. 과거에는 아주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던 밀가루 음식이 졸지에 대중음식이 되어 우리 식탁에 올랐다. 그중에 일등은 물론 국수였다. 빵도, 수제비도 어디까지나 보조였다. 이후 세대는 국수를 생존이 아닌 미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국수를 제일 많이 먹는 민족 중 하나다. 이견이 없다. 재작년과 작년 사이에 불었던 냉면 바람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회적 현상이었다. 적응하기 어려운 평양식 냉면에 열광했다. 남북 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이 한몫했지만, 그렇더라도 값도 비싼 편인 데다가 절대 친숙한 맛이라고 할 수 없는 평양식 냉면이 일으킨 바람이어서 더 의미심장했다. 국수 한 그릇이 한 시대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케이스를 찾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기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국수 하나가 여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계기로 거의 팬덤에 가까운 열광을 얻고 있는 인스턴트 국수 말이다. 너도나도 이 국수를 만들어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국수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애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수 따라 세계 일주
국수는 인접 국가인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나라 대에 밀가루가 중국 지역에 들어오고, 국수 제조법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국수는 매우 고급 음식이었다. 손으로 빚어서 뽑는 국수였기 때문이다. 수타면 정도로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그 후 국수는 많은 변화를 거친다. 한국도 국수가 아주 중요한 음식이 된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다. 그렇게 국수는 몇 가지 방식으로 정리된다.
우선 냉면처럼 압착식으로 뽑는 방식이다. 밀가루가 흔해지기 전까지는 메밀이 국수의 주재료였다. 척박한 산간에서도 잘 자라서 구황으로 쓰기도 좋았고, 생산량이 많았다. 메밀은 칼국수처럼 넓게 펴서 칼로 자르기도 했지만, 냉면으로 만들려면 압착식이 유리했다. 우리가 지금 좋아하는 평양식·함흥식 냉면은 모두 압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스파게티도 봉지에 든 건면은 모두 압착식이다. 된 반죽을 국수틀에 넣어 힘으로 눌러 뽑는 방식이다. 물론 요즘은 기계화되었다.
다음은 칼국수 방식이다. 이것을 절면이라고도 한다. 반죽을 넓게 편 후 칼로 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칼국수다. 집에서 도구 없이 가장 간편하게 반죽하고 요리할 수 있다. 그래서 칼국수에만 유별나게 ‘손칼국수’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우리 민족은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곡물이라면 무엇이든 칼국수를 만들었다. 가장 간단하고 빠르게 요리할 수 있었다. 양념은 된장과 간장, 김치가 주종이었고, 지역에 따라 구하기 쉬운 재료를 넣어 만들어 먹었다.
칼국수가 문헌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음식디미방>이 처음이다. 1670년경의 문헌인데, 메밀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쓰는 방식의 조리법으로 나온다. 메밀로만 만들면 국수가 쉽게 풀어지기에 고려한 방식인 듯하다. 메밀은 순수하게 그 자체만으로도 국수를 뽑을 수 있지만, 쉽지 않다. 이후 한국의 평양식 냉면집에서는 현대 과학 기술의 생산품인 소다와 중조 계열의 알칼리성 식품첨가물로 반죽에 탄력을 더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타(수연) 또는 납면이라고 부르는 방식인데, 이는 손으로 면을 늘여서 뽑는 중국식 면 방식을 뜻한다.
집에서 도구 없이 가장 간편하게 반죽하고 요리할 수 있다.
그래서 칼국수에만 유별나게
‘손칼국수’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칼국수 한 그릇의 역사
서울의 경우 남대문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골목의 역사가 1950년대 이후로 올라가는 걸 보면 칼국수가 어떻게 대중 사이로 퍼져나갔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시장은 대중이 모이는 곳이고, 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당연히 인기 있게 마련이다. 값싼 밀가루와 멸치 육수, 간장, 조미료 등으로 맛을 내 최저 가격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칼국수는 풍부한 전분으로 걸쭉하고 진한 국물이 우러나 허기를 면하기에 그만이었다. 1950~1960년대에는 짜장면이 비싼 음식이었으므로 칼국수가 서민들에게 더 각광받았다. 당시 저렴한 여성 노동력, 시장이라는 값싼 임대료, 수많은 예상 고객이 모이는 시장의 특성, 더 싸게 팔아야 살아남는 재래시장의 조건이 칼국수가 번성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개를 거쳐 소비력이 증가하고, 점차 개별 가게에서 칼국수를 전문적으로 파는 집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칼국수의 육수 방식도 다채로워져 사골과 고기를 쓰는 곳, 바지락 같은 해산물(이는 서해안의 보편적 방식이 서울로 이전한 것인데,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을 쓰는 곳, 과거 방식대로 멸치를 기본으로 쓰는 곳 등 개성 있게 세분화되었다.
서울의 칼국수는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종목인데, 앞서 말한 재래시장 권역과 함께 눈에 띄는 두 가지 지역이 더 있다. 하나는 공업사들이 몰려 있는 권역이다. 1970~1980년대 저임금의 기술 노동자들이 편하게 한 끼를 때우기에 칼국수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재미있게도 학교 앞이다. 지금도 학교 앞 칼국수를 잊지 못하는 졸업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추억의 장소로 많이 찾는다. 아주 흥미로운 맛의 기억이라고나 할까.
서울에서 즐기는 칼국수 한 그릇
영혼까지 위로하는
푸짐한 국수 한 그릇 #TMI
#이게진짜손칼국수다
직접 손으로 밀반죽을 치대고 밀대로 밀어 만들던 집밥 스타일의 칼국수가 생각난다면 간장게장, 해장국으로 이름난 잠원동의 숨은 손칼국수 맛집을 추천한다. 8kg의 거대한 홍두깨로 직접 반죽하고, 35년 노하우로 완벽한 면발을 만들어내는 이곳은 취향에 따라 진한 해물 육수와 사골 육수를 선택할 수 있다.
#앵콜받아마땅한별미
옛날 칼국수를 비롯해 매생이칼국수, 팥칼국수, 들깨칼국수 등 별미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국수와 여러 가지 메뉴를 선보여 하루종일 손님들로 북적인다. 두툼한 면발과 넉넉한 재료 덕분에 인기가 많은 곳으로, 두부전문점 ‘백년옥’과 자매 식당이다. <미쉐린가이드 서울> 빕 그루망에 2017년, 2018년, 2020년 총 세 번 선정되었다.
#요리가된칼국수
자가 제면을 고집하는 김도윤 셰프가 운영 하는 곳. 이곳의 국수는 잡내를 잡아주고 온기를 유지하는 거창유기의 놋그릇에 소담하게 담겨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담백한 대구 살을 올려 내는 따끈국수는 고급스러운 잔치국수 맛이 나고 들기름과 참기름, 잣기름에 비벼내는 미끈국수는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맛이 특징이다.
#20원부터7000원까지
메뉴가 해물칼국수와 고기만두, 김치만두뿐이지만, 반세기 동안 칼국수를 만들어온 만큼 진한 해물 육수에 신선한 바지락과 홍합이 어우러지고 면발도 탱글탱글한 칼국수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쫀득한 만두피와 푸짐한 만두소를 자랑하는 만두는 칼국수를 기다리면서 맛보기 좋다. 칼국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글 박찬일 취재 김시웅 사진 한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