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과 서울시청 주변.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한 이후 오늘에 이르는 근현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다.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과 서울시청 주변은 근대 한국의 출발점이자, 현대 한국의 자화상이다. 제일 먼저 덕수궁 이야기부터 펼쳐본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퇴위한 고종이 이곳에 계속 머물자, 순종이 아버지의 장수를 빈다는 뜻으로 지었으며, 그 전에는 경운궁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형 월산대군이 살던 이곳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정사를 보다가 창덕궁이 완공되자 그곳으로 이어하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고, 그 후 300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했다.
경복궁에 기거하던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외국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경운궁으로 이어할 것을 결정했고, 1897년 고종이 환궁한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고 정동은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황제의 국가로서 위상을 갖추기 위해 고종은 경운궁을 확장했는데, 정동에 있던 공사관과 교회 등의 영향을 받아 돈덕전,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을 속속 세웠다.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 1월 석조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을 헐어 매각했다. 이러한 덕수궁의 수난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황궁으로 회복되기는커녕 날로 팽창하는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더욱 축소되었다. 본래 덕수궁 동쪽 담장은 지금의 서울광장까지 닿아 있었는데, 1968년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김현옥 시장이 태평로를 확장하기 위해 동쪽 담장을 현재의 위치까지 안쪽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이로써 덕수궁은 기존의 3분의 1로 축소되었다.
돌담을 안쪽으로 옮기자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어 결국 2년 뒤 대한문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에서 “당시 대한문 이전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던 조원제 편수와 이광규 대목, 최고의 드잡이공인 김천석이 맡았다. 이들은 대한문을 해체하지 않고 기와를 다 걷어낸 다음 결구를 단단히 묶고 마치 뒷걸음치듯이 통째로 밀어가며 옮겨놓았다.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대한문이 걸어서 간다’며 신기해했다”라고 썼다.
그리고 덧붙여 석조전에 대한제국 역사관이 있으니 덕수궁을 찾은 답사객은 석조전을 꼭 다녀오라고 당부한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에 선포 되어 불과 1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마지막만 떠올릴 뿐, 대한제국의 실체를 역사로 기억하지 못하고 흔히 구한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은 13년 역사가 이어졌고,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중심이자 개화운동의 상징, 정동
고종은 개혁의 일환으로 서구의 근대적 기술과 문물을 도입했고, 대한제국을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박람회에 참가하고 해외에 공사관을 설치하는 등 국제 교류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중심에 정동이 있었다. 개항 이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이 정동에 공사관을 건축했는데, 미국은 원래 한옥을 개조해 사용했고, 다른 나라들은 본국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양관(洋館)을 지었다.
미국공사관과 영국총영사관이 정동의 동쪽과 서쪽에 나란히 자리하고, 그 북쪽으로는 러시아공사관과 프랑스공사관이, 다시 그 남쪽으로는 독일영사관이 두루 포진했다. 그래서 흔히 이 지역을 일컬어 ‘공사관 구역’, ‘공사관 거리’라고 불렀다.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선교사들도 자연스레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이 바로 제중원을 설립한 호러스 앨런(Horace Allen). 정동 일대가 선교 활동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정동제일교회, 성공회대성당, 새문안교회 등 다수의 교회가 들어섰다. 그러나 선교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우선 학교를 설립해 교육 사업에 주력했는데 이때 세운 학교가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학당, 정신여학교의 모체가 된 정동여학당 등이었다. 이렇게 정동은 점점 서양인 거주지로 변모했고, 이곳에 살던 한국인은 보상을 받고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른바 ‘서양인촌’이 형성된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 100m 58년 만에 개방
을사조약의 여파로 각국 공사관은 대부분 폐쇄하거나 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 또 한국전쟁과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영국공사관만 오롯이 보존되었고,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의 3층 석탑 정도만 잔재해 있다. 문화재청과 중구청은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러시아공사관과 아관파천 때 고종이 간 길을 복원한다고 밝혔다. 약 110m 길이의 이 길은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공사관이 만든 지도에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돼 있다.
한편 지난 8월에 영국대사관 철문에 막혀 있던 덕수궁 돌담길 100m 구간이 58년 만에 개방됐다. 이 길은 고종이 선원전과 러시아공사관, 경희궁 등으로 드나들던 길목으로, 영국대사관 측에서 점유한 후 철문을 설치하면서 덕수궁 돌담길과 단절되었다. 정동은 개화기 이후 각국 외교의 중심지이자 신문물 발생지였고, 선교·교육·의료, 그리고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교류의 무대로 한국 근대화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태평로 일대는 식민 통치의 상징 구간
고종은 환구단을 짓고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그곳에서 거행했다. 2년 후에는 팔각 3층 전각인 황궁우를 세웠고,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려 석고(石鼓) 3개를 세웠다. 그러나 일제는 1913년 환구단을 헐고 이듬해 총독부의 조선 철도호텔을 지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들어서 있고, 호텔 내에 황궁우와 석고만 외롭게 남아 있다.
일제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황토현길을 밀어버린 후 태평로를 개설했다. 광화문통에는 경기도청, 경찰관강습소, 체신국 등 관청이 차례로 들어섰고, 1926년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이 준공되면서 식민지 중앙행정 부서가 집결한 식민 통치의 상징 구역이 되었다. 이때 지은 경성부청이 지금의 서울시청 청사다.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지상 4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광복 이후 2011년까지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하는 동안 수차례 증·개축하면서 건물 외관이 다소 변형되었지만, 건물의 주요 부분은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서울시 신청사를 완공한 후 리모델링을 거쳐 2012년 서울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오로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시청 주변에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 서울 도서관 외 또 있다. 바로 서울광장이다. 서울광장은 3·1운동과 6월 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으며,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시민의 축제 마당이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 대신 광장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차도를 없애고 잔디밭을 넓혀 서울광장으로 개장했다. 잔디광장에서는 각종 대규모 문화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겨울이 되면 광장 한쪽에 스케이트장을 개장해 서울 시민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개혁을 추진했는데, 정동은 개혁의 중심지였다. 경성부청으로 시작해 광복 후 서울시 청사로 이름이 바뀐 서울시청은 90여 년 동안 한자리에서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의 중심을 관통하는 태평로(현 세종대로)가 지나가는 등 변화하는 서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897년 대한제국 출범 이후 지금까지 120여 년의 근현대사를 논하기에 서울시청 주변과 정동만큼 적당한 곳이 또 있을까? 120여 년의 시간 속에는 굴곡진 역사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도 담겨 있다.
2018년 무술년이 밝았다. 무술년에는 스케이트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밝고 행복한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광장 70년의 기록
글이정은일러스트조성흠사진홍하얀 사진 제공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 아카이브, 서울도서관 참고 자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창비), 서울역사박물관,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