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동요로 뿐만 아니라 자장가를 비롯해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빠지지 않고 불렸던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온 국민 사이에서 애창되었던 국민 동요 <반달>.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래를 만든 음악가에 대해 아는 이 또한 많지 않으니 ‘반달 할아버지’로 불렸던 윤극영 선생의 가옥에 대한 생소함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서울시는 윤극영 선생의 가옥을 매입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천천히나마 옛이야기들을 간직한 도시로 바뀌어가는 서울의 변화가 반갑기만 하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 내려 느꼈던 도시의 분주함은 마을버스를 타고 4·19국립묘지 부근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낮게 내려앉은 회색빛 겨울 하늘에 포근함이 묻어 있던 조용한 오후였다. 개발로 인한 다층 연립주택들 사이에 기와를 얹은 단층집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띈다. 바로 윤극영 선생이 마지막 노후를 보냈던 집이다. 좁다란 마당에 들어서자 처마 아래 놓인 작은 스피커에서 그가 만든 동요들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율. 어느새 함께 따라 부르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1903년 종로구 소격동에서 태어난 윤극영 선생은 홍난파, 박태준 등과 함께 동요 작곡계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일본말 노래가 주를 이루었던 당시 우리말 노래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보급했다는 점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 192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라고 일컬어지는 lt;반달gt;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하니 더욱 애틋함을 남긴다.
“내가 다섯 살 때 시집간 맏누나가 고생만 하다 서른여섯 살에 세상을 등졌어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조각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달을 보니 더욱 슬퍼져 떠오른 곡입니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어 국내는 물론 만주와 일본에서까지 널리 불리며 확산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노래를 탄압했던 본인들까지 노래를 따라 불렀을 정도였으니 노래 하나가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일본 문화에 묻혀 사라져갈지 모를 우리 풍속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날>이라는 노래는 지금도 설 명절에 빼놓을 수 없는 대표곡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드름>, <고기잡이>, <기찻길 옆 오막살이>, <어린이날>, <나란히 나란히>, <엄마야 누나야>,<무궁화> 등 제목만 들어도 전 곡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노래들이 가득하다.
1923년에는 방정환이 조직한 ‘색동회’의 일원이 되어 어린이 운동을 펼쳐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서기도 했다. 친일 논란도 없지 않았지만 광복 후에도 왕성한 활동은 지속되었다. 이름뿐이었던 색동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 회장을 역임했고, 어린이 문화 활동을 비롯해 무궁화 보급 운동 등을 이어 나간 그는 향년 86세로 별세할 때까지 600여 곡의 노래를 남겼는데 한평생을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천히 가옥을 둘러본 후 처마 밑에 서서 작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잎은 떨어지고 가지만남은 겨울나무들이었지만 왠지 앙상하고 쓸쓸한 느낌에 앞서 부드럽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머리 위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동요 때문은 아닐까. 나는 몇 곡의 노래들을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익숙지 않아 특히 귀를 기울였던 <반달>의 2절 가사가 인상 깊다.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넓고 넓은 우주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만나는 샛별 등대를 향한 고마움은 얼마나 클까. 그는 이제 없지만, 그가남긴 노래들은 더욱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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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다양한 매체에 글과 그림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사연이 있는 나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