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면 열 모두 시선을 빼앗기는 아름다운 산
봄이면 새색시 치맛자락처럼 고운 진달래꽃을 여기저기피워내는 산, 인왕산.
예로부터 유독 경치가 빼어난 산으로 알려져 이곳을 먹으로 옮긴 화폭도 여러 점이다. 그중하나가 국보 제216호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다. 인왕산에 머물며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 그려냈던 정선은 그의 400여 작품 가운데에서도 제일 유명한 &;인왕제색도;를 통해 이곳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길이 남겼다. 오늘은 볼 것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은 아름다운 인왕산을 걸어보자.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 오늘날에는 청와대에 인접한 인왕산은 종로구의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과 서대문구의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길게 뻗은 산으로, 높이는 338m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겉보기에는 험준하며 기세가 옹골차다. 마치 군주 뒤에 단단히 버티고 선 장수 같은 모양새다. 본래 인왕산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을 세울 때부터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을 안산(案山),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을 만큼 명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이 산이 처음부터 인왕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것은 아닌데, 조선 초기에는 서산(西山)이라 불리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지금의 인왕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인왕’이란 불법을 지킨다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으로, 조선 왕조를 길이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인왕산이라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영험한 기운을 두른 산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서울을 두르고 있어 도심을 조망하기에 좋은 산으로도 손꼽히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남산이라면 그 반대가 인왕산과 북악산이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이니만큼 인왕산을 오르는 길목은 여러 군데가 개발돼 있다. 그중 사직근린공원,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청운공원,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을 지나는 이 길은 총 2.5km의 무(無)장애길로서, 보행 약자는 물론 누구나 가뿐히 오를 수 있는 완만한 산책로다. 편한 옷차림을 하고서 아름다운 인왕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1시간 30분가량 걷다 보면 어느새 산책이 훌쩍 끝나버린다. 곳곳에 역사적 장소가 많으니 어린 자녀와 함께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곳곳마다 우리네 역사가 서려 있는 곳
사직근린공원은 사적 제121호인 사직단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을 일컫는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면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사직단에는 사단(社壇)과 직단(稷壇), 두 개의 단이 있다.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고 단에는 각각 돌기둥을 세워서 대지의 신 후토씨(后土氏)와 곡식의 신 후직씨(后稷氏)를 모셨다. 이곳에서 나라의 예를 따라 여러 제사를 지낸 것은 물론 나라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를 지내는 등 성역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10년 전후 일제에 의해 제사가 폐지되었고, 사단과 직단 주위의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으며, 달랑 두 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그 의미와 장소를 훼손한 것이다. 그러다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돼 1980년대에 부속 건물들이 일부 복원되는 등 현재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난을 겪은 사직단을 흘낏 바라보니 내내 푸르던 잔디는 찬 바람을 맞아 누르께하게 변했지만 네모반듯한 사직단의 모습은 지난날의 수난을 꿋꿋이 버텨온 그 강직한 모습과 닮아 있는듯했다.
사직근린공원 옆의 인왕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을 모신 단군성전이 나온다. 고아한 성전 안에는 단군 영정과 단군상이 봉안돼 있으므로 아이와 함께 온다면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단군성전을 나와 수성동계곡 쪽으로 향하는 길에 번쩍이는 호랑이 상이 보인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왕산은 유독 호랑이와 관련된 몇몇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그중 하나가 강감찬 장군 이야기다. 강감찬 장군이 이 지역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근방에 호랑이가 많아 백성들이 고통받자 장군이 노승으로 변해 있던 호랑이들의 대장에게 호통쳐 무리를 내쫓았다는 이야기다. 만약 자녀와 함께 자락길을 걷는다면 아이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호랑이 상을 지나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성동계곡이 나온다. 수성동계곡은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복원한 곳이다. 예로부터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 박윤묵이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아파트를 만들 당시 경관이 일부 훼손되었지만 겸재의 그림 속 풍경을 얼마큼 유지하고 있다가, 현재는 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을 복원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과연 한 폭의 산수화처럼 너른 바위와 돌다리가 멋스럽다. 여름날 흐르는 물소리에 맞춰 시 한 수 읊조리는 문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근처에는 정자도 하나 놓여 있는데 정자 위에 올라서 발아래를 보면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고개를 들면 깎아지른 듯한 산세가 보인다. 계곡과 노출된 암반, 그 사이사이를 수놓은 청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 보는 것이 혹 고아한 수묵화는 아닌가 두 눈을 의심하게 된다.
계곡을 나와 다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운공원이 보인다. 청운공원은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를 새롭게 단장하여 만든 공원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조망 장소 중 하나로, 북악산 산길과 저 멀리 N서울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을 푸근한 산세로 끌어안은 모양새다. 청운공원 자락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도 자리하는데, 이곳에 시인의 하숙집이 있어 자주 언덕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언덕에는 도심의 경치를 뒤로하고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새긴 바위가 놓여 있어서 고즈넉한 언덕 위에 올라 시를 읊었을 그의 심상을 짐작케 한다. 또 근방의 윤동주문학관은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전시관이다. 산자락에 아담하고 반듯하게 자리한 하얀 건물이 어쩐지 시인을 닮았다.
누구든 반하는 산, 인왕산
인왕산 자락길을 걷다 보면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서 혼자운동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청와대 근방이라 자락길 내 보안도 좋아 산에 슬쩍 어스름이 내려도 운동하는사람들은 줄지 않는다. 예로부터 영험한 산이라 칭송 받던 산이 이제는 우리 옆으로 한 걸음 내려앉은 것이다.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인 데다 걷기에 편한 길, 곳곳의 약수와 운동 기구까지 더해지니 이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산책길이 되었다.
서울 복판에 위치하여 언제든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인왕산. 이번 주말에는 자녀의 손을 붙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산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글 문아랑 사진 나영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