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 시절 알게 된 건, 파티시에가 셰프 못지않게 독립적인 이름값으로 대접받는 직업이라는 사실이었다.
동네 빵집 주인도, 호텔 수석 파티시에도 저마다 자기 이름을 건 장인으로 존중받았다.
한국에서 요리사는 이연복처럼 스타가 된 것과 달리 파티시에에게는 오랫동안 그런 자리가 따로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가 스타 파티시에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한국의 제과·제빵은 다른 속도로 흘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 간극이 눈에 띄게 좁혀지고 있다.

레브두를 대표하는 모던 디저트. 클래식의 뼈대는 그대로 두되 재료 하나하나에 요즘 감각을 더한다.
빵은 국경을 넘으며 자란다
크루아상의 기원이 프랑스가 아닌,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초승달 모양의 원조는 빈의 오랜 빵 ‘키플’로, 1838년 무렵 오스트리아 출신 아우구스트 창이 파리 리슐리외가에 비엔나식 빵집을 열며 파리에 상륙했다. 낯선 빵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초승달을 뜻하는 ‘크루아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버터 반죽을 겹겹이 접어 굽는 지금의 바삭한 크루아상은 그로부터 수십 년 뒤, 프랑스 제과사들의 손에서 완성됐다는 사실. 빵과 파티스리 사이 그 존재는 그렇게 두 번의 국경을 건너 프랑스의 상징이 됐다. 제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기술은 한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국경을 넘을 때마다 그 땅의 입맛과 섞여 새로운 얼굴을 갖는다. 한국의 레트로 빵집들이 품은 맛도 마찬가지로 프랑스 제과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프랑스도 일본도 아닌 독자적인 풍미로 자리 잡았다. 지금 서울의 모던 디저트 신에서 벌어지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번엔 경유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학파 셰프들이 파리와 도쿄, 뉴욕에서 배운 것을 곧장 서울로 가져오며 글로벌 트렌드가 즉각 접시 위에 반영된다는 사실.
피카소가 된 파티시에, 과일이 된 케이크
해외에서 파티시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름들이 있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4대째 제과업을 이어온 가문 출신인 피에르 에르메는 커피, 초콜릿, 바닐라 정도로 한정돼 있던 마카롱에 트러플과 고추냉이 같은 파격적인 재료를 적용해 ‘디저트계의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7년에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까지 받았다. 파리 르 뫼리스 호텔에서 경력을 쌓은 세드리크 그롤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가 만드는 레몬이나 헤이즐넛 모양의 디저트는 겉모습만 진짜 과일을 닮은 게 아니다. 그 안에는 무스, 크레뫼, 비스퀴, 콩피처럼 서로 다른 질감의 층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모든 층이 결국 하나의 향미로 수렴하도록 설계돼 있다. 눈속임이 아니라 향과 맛, 질감을 과학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작업이다. 이런 성취가 개인기에 그치지 않는 건, 그 뒤를 받치는 제도 때문이다. 1924년 시작된 프랑스 국가 명장 제도, 이른바 MOF는 4년에 한 번 파티시에를 포함한 각 분야 장인을 선발해 소르본에서 수여식을, 엘리제궁에서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사를 연다. 한 번 받으면 평생 유지되는 이 타이틀은 파티시에라는 직업이 하나의 학문이자 계보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한국도 이미 세계 무대 위에 있다
그렇다고 한국이 이 흐름을 뒤에서 좇기만 하는 건 아니다. 2년마다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파티시에들의 월드컵 ‘쿠프 뒤 몽드 드 라 파티스리’에 2025년 한국 대표팀이 출전해 18개국 중 7위를 기록했다. 고동훈 단장 아래 초콜릿 공예의 하진, 설탕 공예의 심소희, 아이스 카빙의 정하연까지 전원이 여성으로 꾸려진 팀이었다. 2026년 1월에는 자매 격 대회인 ‘쿠프 뒤 몽드 드 라 불랑주리’, 이른바 제빵 월드컵에서 김종호 단장이 이끈 한국 대표팀이 거북선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 이후 10년 만의 정상 탈환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파티시에 뒤에는 이런 기초 체력이 있다. 세계 무대에서 검증된 실력이 이제 서울의 골목 상권으로 흘러들고 있는 셈이다. 그 변화는 방송과 SNS에서도 감지된다. 2026년 초 방영된 서바이벌 <천하제빵: 베이크 유어 드림>에는 전국 각지의 제과 제빵인 72명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고, 레브두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레스토랑 셰프들을 스타로 만들었듯, 이제 카메라와 알고리즘이 파티시에를 향하고 있다.

방준호 셰프와 마주 앉아 시그너처인 만겹크루아상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레브두에서 만난 모던클래식
지난달 송파구 송리단길의 레브두를 찾아 방준호 셰프를 직접 만났다. 피에르에르메 재팬과 몽상클레르를 거친 실력파 셰프로 알려진 그였기에 나 또한 만남에 기대가 컸다. 2024년 문을 연 이 디저트 숍의 이름은 ‘달콤한 꿈’이라는 뜻.
도쿄제과학교를 나와 일본식으로 소화된 프랑스 디저트를 익힌 그는, 원래 한 입 크기의 프티가토를 중심에 두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손님들의 발길을 붙잡은 건 비에누아즈리, 그중에서도 겹겹이 접어 구운 ‘만겹크루아상’이었다.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자 얇게 겹쳐진 결 사이사이로 버터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같은 반죽을 다뤄본 입장에서, 그 결 하나하나에 들인 손과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모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전 완성된 클래식을 요즘 감각으로 다시 짚어내는 일이라고. 오페라케이크에 들어가는 커피 대신 홍차로 향을 바꾸거나, 초콜릿 커버처 대신 얇은 코팅으로 마감하며 재료 하나하나에 미세한 터치를 더한다고 했다.
“예전엔 어느 정도 예쁘게만 만들면 됐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다들 재료에 대한 상식이 많아지니 예쁜 건 당연하고 차이점이 있어야 해요.” 그는 코로나19 시기 해외 셰프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SNS와 바이럴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한국 디저트 수준이 짧은 시간에 궤도에 올랐다고 진단했다. 레브두 외에도 애니브, 카페톤처럼 개인 전문 파티시에가 운영하는 매장들이 비슷한 결의 모던 디저트로 요식업계 관계자와 바이럴에 능한 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빈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도쿄를 거쳐 서울로. 단맛은 늘 국경을 넘으며 발전해 왔고, 그 길 끝에 지금의 서울이 있다. 파리의 작업대 앞에서 언젠가 이 거리감이 좁혀지길 바랐던 유학생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서울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세계가 오랜 시간 쌓아온 파티시에의 계보와 연구의 밀도를 이제는 멀리 가지 않고도 서울의 골목 매장에서 한 조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올 추석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토록 완벽한 단맛 한 조각을 건네보는 것도 좋겠다. 뻔한 선물 세트 대신, 서울이 세계와 나란히 걷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을 담아서.
글. 박준우
벨기에에서 제과·제빵과 쇼콜라티를, 파리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과 <냉장고를 부탁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 출연으로 대중과 만났다. 스스로를 ‘셰프보다는 기자’라 불리길 원하는 그는 <맛있는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푸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현재 서촌에서 유럽 정통 디저트 카페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며 음식의 철학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이어가고 있다.
+ 알아두면 좋은 모던 디저트의 대가
피에르 에르메(Pierre Herme´)
‘디저트계의 피카소’로 불린다. 커피, 초콜릿 정도로 한정돼 있던 마카롱에 트러플, 고추냉이 같은 파격적인 재료를 접목했다. 2007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세드리크 그롤레(Ce´dric Grolet)
파리 르 뫼리스 호텔에서 경력을 쌓았다. 진짜 과일과 구분되지 않는 정교한 과일 모양 디저트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 중 한 명이 됐다.
아모리 기숑(Amaury Guichon)
초콜릿·설탕 공예 조각으로 유튜브 2,000만 명 넘는 구독자를 모았다. 넷플릭스 <스쿨 오브 쇼콜라>를 진행했다.
도미니크 앙셀(Dominique Ansel)
뉴욕에서 크루아상과 도넛을 결합한 ‘크로넛’을 만들어 2013년 전 세계적 유행을 일으켰다.
디저트, 클래식에서 모던으로
디저트에도 ‘모던’이 붙는다. 기본기는 지키되 재료를 다루는 방식과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새로운 시도를 더한다.
크루아상은 어쩌다 만 겹이 됐을까. 더 정교한 공정과 서사를 갖춰가는 지금, 저마다의 방식을 풀어낸 세 곳을 소개한다.

만 겹으로 쌓아 올린 바삭함
레브두
크루아상을 천 겹도 아니고 만 겹으로 만든다. 프랑스산 고급 버터를 감싼 반죽을 얇게 잘라 하나하나 붙이고 다시 얇게 펴서 만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일반 크루아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레브두는 일본식 프랑스 디저트를 만드는 카페로, 일본 유명 빵집에서 일했던 방준호 셰프의 두 번째 가게다. 다 구운 크루아상에 설탕물을 발라 한 번 더 구워 바삭함을 살리고 두 종류의 바닐라 속을 섞은 크림으로 채운 ‘만겹크루아상’이 인기다. 여름 한정 ‘복숭아 플레이트’는 잘 익은 복숭아 속에 크림치즈를 채우고 모스카토 와인 젤리로 마무리해 맛은 물론 사진 찍기도 좋은 디저트다.
대표 메뉴 만겹크루아상 5,800원, 복숭아 플레이트 2만2,000원
위치 송파구 송파동
인스타그램 @revedoux_seoul


케이크를 넘어, 경험을 완성하다
카페톤
케이크의 섬세한 단맛과 질감뿐 아니라 커피와 음료의 조화, 공간의 분위기와 음악까지 고민해 하나의 완결된 경험을 추구한다. 바리스타와 페이스트리 셰프 부부가 운영하는 에스프레소 바 & 파티스리 카페톤은 클래식한 케이크를 브랜드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발로나 둘세 초콜릿에 통카와 마스카르포네를 더한 ‘둘세코코’는 에스프레소에 어울리도록 단맛을 절제했고, 아카시아 꿀과 서양배를 올린 ‘미엘’은 셰프의 어린 시절 기억을 옮겨온 메뉴다. 망고, 청사과 등 제철 재료로 만든 케이크도 계절마다 새로 내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 메뉴 둘세코코 1만1,000원, 미엘 1만1,000원, 망고 타르트 1만1,000원, 미도리 1만1,500원
위치 마포구 성산동
인스타그램 @kafe.tone


화려한 케이크를 작고 세련되게
애니브
일본에서 배운 기술과 캘리포니아 감성으로 개성 있는 케이크를 선보이는 애니브. 일본 웨딩 케이크 전문점 ‘애니버서리(Anniversary)’ 총괄 셰프 출신이자 현재 미국 유명 베이커리 ‘사투라 케이크(Satura Cakes)’를 운영 중인 정승호 파티시에가 고급스럽고 사이즈가 작은 ‘프티가토’ 스타일의 디저트를 선보인다. 대표 메뉴는 쇼트케이크. 촉촉하고 가볍게 녹아드는 제누아즈 위에 딸기, 복숭아, 샤인머스캣 등 제철 과일을 올리고 섬세한 레이스 무늬로 마무리한다. 부드럽고 폭신한 카스텔라 역시 은은한 단맛으로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다. 케이크를 구매하면 ‘당신의 첫날을 위해’라는 메시지 카드를 동봉해 인생의 특별한 순간에 낭만을 더할 수 있다.
대표 메뉴 애니브 쇼트케이크 1인용 1만3,800원(홀 5만8,000원), 시그니처 카스테라 2만 원, 과나하 1만2,800원
위치 서대문구 연희동
인스타그램 @anniv.official

글 구희수 사진 방석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