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골목, 내가 운영 중인 카페 오쁘띠베르의 문이 빼꼼 열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절반쯤은 다음 대사를 예상한다.
“빙수 있어요?” 반쯤 들어왔던 몸이 “없다”는 대답에 슬그머니 사라진다.
실망이라기엔 애매하고 배신이라기엔 과한, 그 어디쯤의 표정.
갓 구운 타르트가 진열대에 가득해도 여름 관광객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카페라면 응당 빙수 한 그릇쯤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그만큼 단단하다.
정작 나는 빙수를 자주 찾는 쪽은 아니다. 접시 하나의 완결성을 중요하게 배운 습관 탓인지, 한 그릇을 여럿이 함께 떠먹는 방식에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달까. 그렇다고 그게 빙수라는 음식 자체에 대한 거리감은 아니다. 애초에 이 디저트는 누군가와 나눠 먹는 걸 전제로 태어났고, 그 정겨움이 지금까지도 빙수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요즘은 1인분씩 작은 그릇에 담아내는 곳도 흔해진 만큼, 나눔이 빙수의 유일한 정답은 아니게 됐다는 것도 짚고 싶을 뿐이다. 저 문 앞의 표정을 여름 내내 마주하다 보면, 이 디저트가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힘은 결국 그 출발점, 함께 떠먹던 정서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리치와 라임, 청양고추, 마늘로 만든 시고로의 애피타이저 빙수. 회에 곁들이는 세비체 소스를 통째 얼린 발상이 독특하다.
얼음이 걸어온 길
얼음이 특별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겨울 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빙고’라는 저장고에 넣어두고 여름까지 아껴 썼는데, 그 분배는 왕의 권한이었을 만큼 귀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한 그릇씩 퍼먹는 빙수가 한때는 왕실과 양반가만 누리던 사치품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지금의 팥빙수 형태가 자리 잡은 건 6·25전쟁 이후. 미군을 통해 들어온 연유와 초콜릿 시럽을 얹으면서 맛이 더 풍성해졌고, 간 얼음 위에 단팥과 떡을 올리는 조합은 1980년대를 지나며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이후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레시피로 롱런하는 국민 여름 별미가 되었다.
판이 뒤집힌 건 2008년, 제주신라호텔이 제주산 애플망고를 얹은 빙수를 내놓으면서다. 지역 식재료 하나 살려 보자는 소박한 시도가 예상 외의 폭발적 반응으로 돌아온 것. 2011년에는 서울신라호텔로 옮겨붙었고, 그 뒤로 호텔가의 여름 흥행 공식 자체가 바뀌며 애플망고 품귀 현상을 빚어냈다. 이후로 매 시즌 새로운 프리미엄 빙수가(어떤 해에는 10만 원을 훌쩍 넘는 것들이) 쏟아졌지만, 신라호텔이 처음 쌓아 올린 그 이름값을 넘어선 곳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얼음 자체의 결도 바뀌었다. 물 대신 우유를 얼려 눈처럼 곱게 갈아내는 방식은 1985년 서울 현대백화점에 자리한 밀탑이 먼저 시도했지만, 백화점 식당가 안쪽에 머무는 프리미엄 메뉴로 오래 남아 있었다. 이 방식이 물빙수를 밀어내고 주류로 올라선 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고 나서다. 얼음이 고와지자 그 위에 얹는 재료들의 맛도 덩달아 선명해졌고, 이후로도 팥 없이 과일 퓌레만으로 승부하는 도쿄빙수 같은 브랜드가 하나둘 등장하며 빙수의 문법을 조금씩 넓혀갔다. 팥과 얼음만을 정갈하게 내놓는 클래식파부터 딸기며 수박이며 멜론 등 각종 고명을 시그너처로 내세운 화려한 빙수까지, 서울은 그야말로 빙수 춘추전국시대가 되었고, 수도의 유행은 곧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시고로에서 애피타이저 빙수를 맛보는 박준우 셰프. 평소 빙수를 즐기지 않는 그도 이 한 그릇 앞에서는 숟가락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얼음 위에서 벌어지는 실험
여기까지 훑고 나면 빙수는 하나의 고정된 레시피라기보다 곱게 간 얼음이라는 질감 위에 무엇이든 올려볼 수 있는 흰 도화지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도화지가 최근에는 단맛의 영역을 아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에서 마주친 시고로의 애피타이저 빙수가 그 증거다.
시고로를 이끄는 이경호 오너 셰프와는 방송 〈올리브쇼〉에 함께 출연하며 인연을 맺었다. 카메라 밖에서도 재료를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사람이라고 기억하는데, 청담동에 자리한 그의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그 태도가 접시마다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러스틱 퀴진을 표방하며 여러 나라의 요리를 지중해풍으로 풀어내는 이곳은 투박한 ‘시골’ 밥상 같은 요리를 지향한다는 뜻에서 ‘시고로(시골로)’가 되었다. 정형화된 코스보다 개성있는 한 접시 한 접시에 힘을 싣는 스타일로, 그 개성이 정점을 찍는 지점이 애피타이저로 나오는 빙수다. 회에 곁들이는 세비체 소스를 통째로 얼려버린 발상이라니! 곱게 갈린 연두색 얼음에 숟가락을 대는 순간 눈처럼 부서지고, 리치의 은근한 단맛과 라임의 산미, 청양고추의 알싸한 뒷맛이 밀려든다. 차갑고, 달고, 은근히 맵고 신 감각이 동시에 혀 위에 도착하는데 이상하리만치 다툼 없이 잘 어우러진다. 애피타이저로 내놓는 이 메뉴의 인기가 워낙 높아 디저트 카페도 아닌 레스토랑에서 빙수기를 들였고, 지금은 시고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내년에는 강릉에도 매장을 낸다고 하니, 동해 바다를 앞에 두고 이 낯선 한 그릇을 만날 날도 머지않았다.
빙수를 자주 찾지 않던 나에게 시고로의 그릇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여럿이 나눠 먹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아무도 먼저 맛본 적 없는 낯섦을 각자의 숟가락으로 마주하는 즐거움. 빙수가 나눔에서 출발한 음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이제는 각자의 몫으로도 얼마든지 완성될 수 있다는 걸 이 한 그릇으로 느껴본다. 문 앞에서 빙수를 찾던 그 표정들이 기다린 것도 어쩌면 매년 같은 얼굴이 아니라 이런 낯선 한 술이었을지 모른다.
글. 박준우
벨기에에서 제과·제빵과 쇼콜라티를, 파리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과 <냉장고를 부탁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 출연으로 대중과 만났다. 스스로를 ‘셰프보다는 기자’라 불리길 원하는 그는 <맛있는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푸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현재 서촌에서 유럽 정통 디저트 카페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며 음식의 철학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이어가고 있다.
+ 빙수와 닮은 세계의 빙과
가키고리(일본)
헤이안 시대, 겨울에 저장해 둔 얼음을 귀족들이 여름에 깎아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세기 이후 얼음이 널리 보급되며 서민 간식으로 퍼졌고, 눈처럼 부드러운 얼음 결과 맑은 시럽이 특징이다. 우유가 아닌 얼음 자체의 질감으로 승부하는 쪽에 가깝다.
바오빙, 쉐화빙(대만)
‘얼음을 깎아낸다’는 뜻의 바오빙(
)"에서 출발해 최근에는 우유를 얇게 저며 켜켜이 쌓아 올리는 쉐화빙(
)이 대표 격이 됐다. 생망고를 듬뿍 올린 망고빙수가 특히 유명하며, 얼음 자체가 얇은 리본처럼 겹겹이 쌓이는 모양이 특징이다.
셰이브 아이스(하와이)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 일과를 마치고 큰 얼음 덩어리를 작두나 대패로 민 후 시럽을 얹어 먹던 데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키고리의 한 갈래인 셈인데, 무지개색 시럽과 리힝 파우더 같은 하와이 특유의 토핑이 더해지며 독자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그라니타(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유래했으며, 과즙이나 커피를 얼리면서 주기적으로 긁어 거친 얼음 결정을 만든다. 곱게 가는 다른 나라의 빙수와 달리 일부러 거칠고 서걱한 식감을 남겨 두는 쪽인데, 그 투박함이 오히려 시칠리아 여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빙수는 더 이상 팥과 떡만 올리는 디저트가 아니다.
광어를 올려 반전을 주기도 하고, 기본 재료만으로 정직한 맛을 완성하기도 한다. 전통 디저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 그릇까지.
같은 계절, 다른 방식으로 여름을 담아낸 세 곳을 소개한다.

광어를 품은 반전 빙수
시고로
광어를 빙수에 올린다. 언뜻 낯설지만 한 입 맛보면 의외로 자연스럽다. 남미의 세비체에서 착안한 광어와 고수빙수는 잘게 간 얼음 위에 신선한 광어와 고수, 셰프 소유 농장에서 수확한 제철 재료를 더해 상큼하고 시원한 풍미를 완성한다. 해산물의 감칠맛과 허브 향, 차가운 얼음이 어우러지며 익숙한 빙수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청담동 골목에 자리한 캐주얼 양식당 시고로는 한국의 제철 농산물과 신선한 해산물로 ‘시골스러운 맛과 멋’을 풀어내는 곳. 광어 빙수는 갈치속젓 스파게티와 함께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한 달 300~350그릇 이상 판매되는 시그너처 메뉴로 자리 잡았다.
대표 메뉴 광어와 고수빙수 1만8,000원
위치 강남구 청담동
인스타그램 @sigolo.seoul


정직한 팥빙수의 정석
통의동 단팥
팥, 우유 얼음, 떡. 익숙한 재료일수록 기본이 중요하다. 통의동 단팥은 매일 삶는 국산 팥과 물이나 파우더를 섞지 않은 순수 우유 얼음으로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완성한다. 빙수 위에 올리는 떡과 인절미 역시 직접 만들어 쫀득한 식감을 살렸고, 주문 즉시 완성하는 모나카는 바삭한 식감이 오래 유지된다. 식으면 묵처럼 굳을 만큼 진한 단팥죽까지, 화려한 토핑 대신 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는 곳이다. 합리적인 가격까지 더해져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 메뉴 팥빙수 1만 원, 콩빙수 1만1,000원, 단팥죽 8,500원, 모나카 4,500원
위치 종로구 통의동


적당히, 새롭게 빚은 빙수
을지로 적당
전통 디저트가 한층 가볍고 산뜻한 여름 메뉴로 다시 태어났다. 전북 부안산 팥을 곱게 갈아 올린 팥빙수는 재료 본연의 풍미를 담백하게 살렸고, 여름 한정 배빙수는 마스카르포네 배 크림과 배청, 다이스한 배를 듬뿍 올려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을 즐길 수 있다. 막걸리를 활용한 막걸리빙수 역시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개성 강한 메뉴.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2 준우승 출신 김태형 대표가 우리 식재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전통 디저트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풀어낸 공간이다. 9가지 양갱과 팥라떼 등 함께 즐길 수 있는 메뉴도 다양하다.
대표 메뉴 팥빙수 1만7,000원, 배빙수 2만 원, 막걸리빙수 1만4,500원, 9가지 양갱 3,000~3,800원
위치 중구 을지로1가
인스타그램 @euljiro.jeokdang

글 구희수 사진 방석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