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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할 때 가방을 열어

나는 불안할 때 가방을 열어
2026.06

문화

서울 트렌드

나는 불안할 때 가방을 열어

474

음성·문자 지원

“불안하지 않은 거. 그냥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속 대사가 많은 이의 마음을 건드린 건,
그 말이 너무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창한 행복도, 완벽한 안정도 아닌 그저 오늘 하루가 조금 덜 흔들리기를 바라는 마음.
불안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 뒤에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다. 일상의 바닥에 얇게 깔린 기류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는 대신 다루고 달래는 법을 찾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꾸린 ‘불안 가방’을 들고서.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 확산 중인 ‘불안 가방’은
공황 발작이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올 때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소품을 담은 작은 파우치로,
소셜 미디어에서 “왓츠 인 마이 ‘불안’ 백”이라는 영상을 올리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안을 견디는 법을 공유하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1 헤드폰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외부 소음을 차단해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가장 빠른 아이템.
2 키캡 ‘딸깍’거리는 타건감으로 손끝 감각을 깨우는 작은 집중 장치.
3 스트레스 볼 반복적으로 쥐고 누르는 사이 긴장 완화.
4 신맛 사탕·젤리 강한 산미로 감각을 순간적으로 환기.
5 피젯 토이(감각 스톤, 트위스트) 손을 계속 움직이게 만들어 불안한 생각의 흐름을 끊어내는 도구.
6 아로마 롤온 호흡을 안정시키고 긴장을 완화하는 휴대용 멘털 케어템.
7 미니 괄사 가벼운 마사지로 몸의 긴장 완화.
8 슬라임 말랑한 촉감과 늘어나는 움직임으로 집중 유도.
9 아이스 팩 차가운 자극으로 과열된 감각을 빠르게 진정시키는 응급용 아이템.

나 지금 떨고 있니?

아침에 눈뜨면 스마트폰부터 손에 쥔다. 쏟아지는 알림과 뉴스 속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출근길 지하철과 점심시간,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도 화면은 멈추지 않는다. 무언가를 놓칠까 봐, 뒤처질까 봐, 혹은 습관처럼. 바쁘지 않아도 쉬지 못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하루를 버틴다. 다음 수치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국내 불안 장애 환자는 2020년 74만5,198명에서 2024년 89만6,256명으로 증가*했다.

현대인의 불안감이 깊어지는 중심에는 끊임없이 연결된 환경이 있다. 국내 이용자**들은 평균 4.25개의 소셜 미디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의 피드를 닫으면 또 다른 창이 열리고, 타인의 일상은 쉬지 않고 전해진다. 문제는 단지 비교가 아니다. 쉬는 시간에도 ‘생산적으로 쉬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따라붙고, 운동과 취미마저 기록과 콘텐츠가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조차 불안해지는 시대. 쉴 틈 없이 연결된 삶은 우리의 긴장 상태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25년 국정감사 자료
** 한국언론진흥재단 2024 소셜 미디어 이용자 조사

참는 대신 관리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사람들이 불안을 혼자 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건강’이 예민한 단어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SNS에서 자신의 불안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다스렸는지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됐다. 감정을 일기처럼 기록하는 저널링, 하루 10분 호흡 훈련, 수면 패턴을 추적하는 웨어러블 기기 등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일을 ‘멘털 케어’라 부르며 운동이나 식단처럼 일상 루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시장도 이 흐름을 반영한다. 명상·심리·AI 상담 등을 아우르는 디지털 멘털 케어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며 마음 관리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

서울시도 시민의 마음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신 건강 통합 플랫폼 ‘블루터치’를 운영하며 상담, 정보 제공, 심리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 등 예방 중심 정책도 이어가는 중이다. 이제 마음 건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가 함께 고민하는 영역이 되고 있다

가방 속 작은 심리적 구급함

불안을 관리하는 방식은 더 작고 구체적인 물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 확산 중인 ‘불안 가방(anxiety bag)’은 공황 발작이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올 때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소품을 담은 작은 파우치로, 소셜 미디어에서 “왓츠 인 마이 ‘불안’ 백(What’s in my anxiety bag)”이라는 영상을 올리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안을 견디는 법을 공유하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내용물은 단순하지만 의도는 분명하다. 강한 자극으로 불안감을 환기할 다양한 아이템은 저마다 오감 중 하나에 작용한다. 감각을 붙잡음으로써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불안을 밀어내는 것이다. 국내에서 이 흐름은 스트레스 케어 아이템 소비 열풍으로 이어졌다.

‘딸깍’거리는 타건감을 언제든 즐길 수 있는 키캡 키링, 손안에서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슬라임과 스트레스 볼은 이미 Z세대 사이에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급식판 모양, 에그타르트 모양 등 유쾌한 디자인까지 더해지며 불안 관리 도구는 어느새 하나의 감각 굿즈로 진화하는 중이다.

불안을 없애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

예전에는 불안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불안 따위는 이겨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꼭 필요한 일도 아닐지 모른다. 불안은 더 잘하고 싶고, 상처받고 싶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신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숨기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인식하고 다룰 수 있는 하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신맛 사탕 하나가 공황을 멈춰주지는 않는다. 명상 앱 10분이 오늘의 걱정을 모두 지워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작은 행위들이 쌓여 나를 지금 여기로 데려온다. 완벽한 안정보다 조금 더 편안한 오늘. 현대인이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어쩌면 그렇게 소박하고 정직하다.

전문의에게 물어봤어요

장승용(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불안은 없애야 할 결함이 아니라, 잘 읽고 다루어야 할 신호입니다”

- 장승용(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불안 가방’처럼 감각을 자극하는 물건이 실제로 불안 완화에 도움이 되나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불안이 심해질 때 사람은 머릿속 생각에 강하게 끌려갑니다. 이때 신맛 사탕, 차가운 아이스 팩, 피젯 토이 같은 감각 자극 아이템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현시점으로 돌아오게 해줍니다. 불안한 사람에게 필요한 건 “괜찮다”는 말만이 아닙니다. 몸이 실제로 “지금은 괜찮다”고 느낄 경험이 필요합니다. 다만 중요한 건 유행하는 물건을 따라 하기보다 나에게 실제로 맞는 감각과 행동을 찾는 것입니다.

Q. ‘그라운딩’ 기법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나요?

그라운딩은 불안으로 떠밀려 가는 마음을 지금 이 순간에 다시 닿게 하는 방법입니다. 불안이 심할 때 마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위험을 향해 달려가고, 몸은 이미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처럼 반응합니다. 이때 지금 보이는 것, 들리는 소리, 몸에 닿는 감각으로 주의를 돌리면 그 악순환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라운딩은 불안의 파도가 지나갈 때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손잡이에 가깝습니다.

Q. 현대인이 이전보다 더 쉽게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현대인이 더 약해진 게 아닙니다. 뇌와 몸이 처리해야 하는 자극의 양이 너무 많아졌고, 회복할 시간이 줄어든 것입니다. SNS의 더 큰 문제는 비교가 아니라 뇌가 쉴 틈을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멍하니 있는 시간,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이 사라지면 마음은 계속 긴장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계속 반응하며 비교하고 있는 거죠.

Q. 불안을 없애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태도, 어떻게 보시나요?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불안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불안은 위험을 예측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인간에게 원래 필요한 감정입니다. 건강한 불안 관리는 불안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지금 내 몸이 긴장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불안을 적으로만 보면 계속 싸우게 되지만, 신호로 보면 다룰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좋은 셀프 케어는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이 찾아와도 삶이 멈추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음 건강도 서울시가 챙긴다

서울시는 재난 현장과 시민 밀집 지역을 직접 찾아가는 '마음안심버스'를 운영해 HRV스트레스 측정과 VR 힐링 기기를 활용한 상담을 제공한다.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시민이라면 심리 상담 바우처를 통해 전문 상담사와 총 8회 심층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정신 의료 기관에서는 최대 3회 마음 건강 검진도 가능하다. 필요하다면 의료기관이나 정신건강복지센터로도 연계된다. 손 내밀 곳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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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율 사진 방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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