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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은 이름부터가 조연이었습니다. ‘연희동의 남쪽’. 1975년 서대문구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면서 붙은 이름이니까요. 부자 동네였던 연희동의 그늘 아래에서 오래도록 빛을 못 보던 연남동은 홍대 앞이 떠들썩해지면서 조금씩 얼굴을 알렸습니다. 물론 그때도 기찻길 옆 작은 동네였죠. 그러다가 2015년 경의선 폐선 부지가 공원으로 바뀌면서 ‘연트럴파크’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연남동은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연남동은 홍대 바로 옆이지만 홍대와는 전혀 다른 동네입니다. 대형 프랜차이즈 대신 개성 있는 작은 가게, 넓은 도로 대신 구불구불한 골목,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동네 주민,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찾는 프리랜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젊은 이방인들…. 활기차나 소란하지 않고, 붐비지만 여유롭고, 개성 있지만 경쟁하지 않는 동네가 바로 지금의 연남동이지요. 그래서 연남동은 ‘계획’보다 ‘우연’이 더 잘 어울리는 동네랍니다. 경의선숲길에서 시작해 골목 안쪽으로 천천히 스며들다 보면, 어느새 이 동네만의 독특한 숨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철길은 사라졌지만, 그 철길이 만든 골목의 시간과 정겨움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경의선숲길이 이어진 연남동


개성이 강한 독특한 분위기의 가게가 많다.

젊은 외국 관광객이 로컬 체험을 하러 많이 찾는다.

물길과 철길의 흔적이 어우러진 연남동 구간
이야기 하나. 기차 대신 사람이 지나가는 길, 경의선숲길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가장 먼저 경의선숲길이 눈에 들어온다. 뉴욕 센트럴 파크를 닮았다고 해서 ‘연트럴파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이 길의 전신은 기차가 지나던 철길이었다. 1906년 서울과 신의주를 잇기 위해 놓은 경의선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동맥이었고, 분단 이후엔 남북을 가르는 가장 긴 철로가 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 복원 사업이 시작되고, 2009년 용산에서 가좌역을 잇는 지상 구간이 지하화되면서 6.3km의 빈 땅이 생겼다. 그 땅이 2015년 선형 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지금의 경의선숲길이다. 마포와 용산을 잇는 이 선형 공원은 단순한 녹지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끊어져 있던 동네를 다시 연결했고, 사람들의 동선을 바꿨다. 철길이 단절의 상징이었다면 지금 숲길은 연결의 상징에 가깝다.
그중 연남동 구간은 잔디마당과 은행나무길, 물길과 옛 철길의 흔적이 어우러져 연남동의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꼽힌다. 이 길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걷게 만든다’는 점이다. 벤치에 앉아 쉬다가도 자연스럽게 다음 골목으로 이어지고, 걷다 보면 작은 공방과 책방,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숲길을 따라 형성된 문화 인프라도 연남동을 바꿔놓았다. 트렌드를 소비하는 핫플 동네가 아니라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많은, 소박하지만 감각적인 동네. 현재 연남동의 이미지다. 단절의 선이 연결의 길이 되자 기차 대신 사람들이 지나간다. 경의선숲길은 오늘의 연남동을 만든 가장 소중한 풍경이 되었다.
연남동에서 만났어요

김형우(토커바웃커피 브루어스)
“동네가 그리워 돌아왔습니다”
홍대 앞에서 바(bar)와 외식업계를 두루 거친 김형우 대표가 일산에서 카페를 운영하다가 10년 만에 돌아와 차린 공간이다. 낮에는 필터 커피로, 저녁에는 에스프레소 마티니 같은 클래식 칵테일로 하루를 채워간다. 가게 이름처럼 이곳의 진짜 메뉴는 ‘대화’다. 커피를 처음 접하는 손님에게는 원두 향을 직접 맡아보게 하고, 칵테일을 모르는 젊은 손님에게는 세대별로 유행했던 칵테일 이야기를 곁들인다. 그래서인지 외국인부터 인근 음식점의 셰프, 음악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든다. 메뉴 대부분 직접 만든 시그너처로 루이보스티에 유자청을 블렌딩한 유자보스, 콜드브루에 라벤더 베이스를 넣은 콜드브루 라벤더 라떼, 에스프레소에 진을 넣은 에스프레스 마티니 등이 인기가 많다. 서비스 마인드를 장착한 주인장 덕분에 입과 코, 마음까지 즐거워지는 곳이다.

트렌디함과 오래된 동네 정서가 섞여 있는 연남동

ⓒ 한국철도공사
1906년 서울과 신의주를 잇기 위해 놓은 경의선 기차가 달리고 있다.


동네를 둘로 나누었던 철길이 다시 동네를 붙였다.
이야기 둘. 철길이 갈라놓은 동네, 골목이 이어 붙인 시간
연남동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철길의 시간을 알아야 한다. 경의선은 오랫동안 연남동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동네를 둘로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북쪽은 서대문구 연희동, 남쪽은 마포구 연남동으로 나뉜 것도 그 때문이다. 열차가 오가는 동안 선로 주변은 개발에서 비켜나 있었고, 임대료는 자연스럽게 낮게 유지됐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이 연남동을 지켜냈다. 오래된 주택들이 헐리지 않고 남았고, 좁은 골목도 그대로 유지됐다. 낡은 공간을 먼저 채운 것은 화교들이었다.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하면서 화교들이 학교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1991년 소공동 재개발로 터전을 잃은 화교들이 다시 연남동 일대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도 동교로와 성미산로 일대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식당이 여러 곳 있다.
같은 시기 기사 식당 거리도 형성됐다. 연남파출소 기준 연남로와 동교로 약 800m 구간에 1970년대 후반부터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 하나둘 들어섰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정해진 시간 없이 밥을 먹어야 하는 기사들을 위해 문을 여는 이 거리는 2016년 서울미래유산(제2016-036호)으로 지정됐다. 40년째 불판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집 앞에서는 오전부터 연기가 피어오른다. “예전에는 기사님들이 줄 서서 밥 먹었어요. 지금은 젊은 친구들이 더 많이 와요.” 식당 종업원의 말처럼 기사 식당 거리는 이제 ‘옛 서울의 시간’을 체험하려는 사람들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오랜 시간 택시 기사들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는 감나무집

연남동 끼리끼리5길 끝자락에 조성된 공공 미술 벽화

중국 음식 냄새 가득한 연남동에 쌀국수 향을 퍼뜨린 소이연남
이야기 셋. 밀려난 사람들이 만든 핫한 골목
연남동의 부흥은 역설적으로 ‘밀려남’에서 시작됐다. 2000년대 후반 홍대 앞이 대형 클럽과 프랜차이즈 상권으로 급격히 변하면서 예술가와 독립 가게들은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바로 옆, 연남동으로 향했다. 홍대 앞보다 저렴한 임대료, 낡았지만 개조하면 충분히 매력적인 주택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한 골목. 연남동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동네였다.
그 흐름을 가장 먼저 감지한 공간 가운데 하나가 ‘커피리브레’다. 서필훈 대표는 동진시장 안쪽 월세 30만 원짜리 이불 가게 자리에 한약장과 자개상을 들여놓고 커피 공방을 열었다. 국내 최초로 국제커피감별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커피 산지 농부의 얼굴을 봉투에 직접 인쇄하는 ‘얼굴 있는 커피’를 선보이며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퍼뜨렸다. 동진시장이 철거되면서 현재는 더 고즈넉한 동네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툭툭누들타이’와 ‘소이연남’ 역시 연남동 부흥을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섭섭한 이름이다. 골목에 태국 국수와 볶음 요리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연남동을 ‘아시아 음식의 거리’로 확장한 가게들로, 툭툭누들타이는 지난해 연말 강남으로 이전했고 소이연남은 연남동을 지키며 여전히 성업 중이다.
줄곧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또 다른 문화를 만드는 곳도 있다. 2014년에 문을 연 독립서점 ‘헬로인디북스’가 그곳. 이보람 책방지기는 “독립 출판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작가들 곁을 지켜왔어요. 연남동이라는 동네가 그걸 가능하게 해줬고요”라며 “월세가 싸서 버틸 수 있었죠”라고 덧붙였다. 얼마 전부터는 상호를 ‘술책방 헬로’로 바꾸고 책과 어울리는 술 한잔 곁들일 수 있는 ‘북 바(book bar)’로 운영 중인데, 유명한 소설 문장이 가니시로 올라가는 칵테일이 인기가 많다

연남동의 부흥을 이끈 커피리브레. 스페셜티 문화를 알렸다.


2014년부터 줄곧 연남동을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 헬로인디북스

<마녀 배달부 키키> 콘셉트로 꾸며놓은 코리코카페
이야기 넷. 머물고 싶은 취향 저격 아지트
지금 연남동에는 다양한 가게가 골목마다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데, 분위기는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문화 공간’ 역할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전직 바텐더가 자신만의 노하우로 색다른 커피를 만들어주는 ‘토커바웃커피 브루어스’에서는 ‘대화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2층 양옥 주택을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 콘셉트로 꾸며놓은 ‘코리코카페’, 유럽의 가정집 같은 따뜻한 인테리어와 다양한 스콘·케이크로 유명한 ‘카페 레이어드’에서는 나만의 취향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복합문화공간 ‘연남장’도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때로는 전시·공연·행사장으로 변모하며 동네 창작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소비보다 체류, 속도보다 취향이 먼저인 공간을 통해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연남동이 이제는 서울의 새로운 관광 루트로 떠오르고 있다. 젊은 외국 관광객에게 명동, 동대문 같은 전통적 관광지보다 ‘힙한 거리’이자 ‘로컬의 일상과 감각적 체험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동네’로 소문난 것이다.
캐리어를 끌며 골목 사진을 찍고, 독립 서점과 공방을 구경하고, 팝업 스토어를 찾아다니는 외국 관광객이 많아 이태원에 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골목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오래된 생활의 결이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연남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천히 걸으며 찬찬히 둘러보는 것이다. 기차가 떠난 철길 위를 자박자박 걷다 보면 이 동네에 쌓인 여러 겹의 시간이 발자국마다 스며들 것이다.

골목마다 독특한 콘셉트의 가게가 많은 연남동

경의선숲길을 산책하는 주민들

대화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토커바웃커피 브루어스
글 이정은 사진 정지원, 서울관광재단 참고자료 서울시, 마포구청, 서울미래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