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우거진 산기슭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소나무 언덕 아래 나루가 생겨났으며, 밤나무 고갯길을 넘어 마을이 자리 잡았다.
지금은 아파트와 대로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지만, 이 동네들의 이름 속에는 한때 푸르게 우거졌던 숲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 숲이 우거진 산기슭 -> 신림동 [新林洞] _관악구

‘새 신(新)’에 ‘수풀 림(林)’을 쓰는 신림동은 관악산 기슭에 새로 우거진 울창한 숲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 일대는 한양도성 남쪽의 험준한 산지로, 관악산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빽빽한 숲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새로 생긴 숲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고, 이것이 한자로 옮겨지며 신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울창하던 숲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급격히 바뀌었다. 1975년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신림동 일대는 고시촌과 대학가로 변모했고, 좁은 골목마다 하숙집과 분식집이 빼곡히 들어섰다. 지금은 고시촌과 벤처타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번화한 거리지만, 관악산 둘레길과 도림천, 산자락으로 조금만 올라가 보면 이름 속 에 숨어 있던 숲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이야기 하나 더
신림동에는 천연기념물 제271호인 굴참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어 거대한 원통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약 1,000년 전 강감찬 장군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라 나무가 되었다고 전하며, 실제 수령은 2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들이 막걸리를 부어주는 등 보호를 잘해서 매년 굵은 도토리가 열리기도 한다.
소나무 우거진 강변 언덕 -> 송파동 [松坡洞] _송파구

송파동은 ‘소나무 송(松)’, ‘언덕 파(坡)’를 쓴다. 송파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나루터 이름인 연파곤(淵波昆)이 ‘소파곤’으로 변음되었다가 소파리(疎坡里)로 된 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렸다는 설이다. 둘째는 이 마을의 언덕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소나무 언덕, 즉 송파(松坡)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셋째는 옛날 이곳에 사는 어부가 매일 한강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는데, 하루는 잔잔한 물 위에서 고깃배를 타고 낮잠을 자던 중 소나무가 서 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잠이 깬 뒤부터 이곳을 송파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지금은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 대단지 주거 공간이 들어선 대표적 도심 속 주거지지만, 이름만큼은 한강 변 솔숲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이야기 하나 더
송파동에 있던 송파나루는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로, 땔나무와 담배 등을 서울에 공급했다. 270여 호의 객줏집이 있어 전국의 10대 상설 시장 중 하나로 번성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 굴욕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나 한성 남쪽을 드나드는 중요한 통로였다.
밤나무 고개 아래 마을 -> 율현동 [栗峴洞] _강남구

대모산은 강남구 일원동과 서초구 내곡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대고산·할미산이라고도 한다. 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 하여 할미산이라 하다가, 태종의 헌릉을 모신 후 어명으로 대모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강남 끝자락의 율현동은 대모산 자락의 고갯길 풍경에서 이름이 태어났다. ‘밤 율(栗)’, ‘고개 현(峴)’이라는 한자 그대로, 고개 주변에 밤나무가 무성했던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예전에는 성남과 서울을 잇는 산길 초입으로, 밤나무 숲이 계절마다 짙은 그늘을 만들던 곳이다. 지금은 SRT수서차량기지와 주거지가 자리한 조용한 생활권이지만, 대모산 둘레길과 연결된 숲길에서는 여전히 옛 밤고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행정동은 세곡동이다.
+ 이야기 하나 더
율현동 뒤편의 대모산은 강남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도심 속 산행지다. 구룡산과 이어지는 능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심의 소음이 가라앉고, 봄철에는 산벚꽃과 진달래가 어우러져 한때 이 고갯길을 메웠던 밤나무 숲의 기억이 떠오른다.
말을 기르던 드넓은 초원 -> 목동木洞 _양천구

지금은 목동(木洞)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나무 목(木)’이 아닌 ‘기를 목(牧)’을 쓴 목동은 조선 시대 이 일대에 말 목장(牧場)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한강 변의 낮고 넓은 지대에 펼쳐진 초지는 말을 방목하기에 적합했고, 조정에서는 이곳에 사복시(司僕寺) 관할의 목마장을 두었다. 사람들은 말을 먹이고 기르는 이 벌판을 ‘목동’, 곧 ‘말을 기르는 마을’이라 불렀다. 목동 일대는 오랫동안 한강 범람의 영향을 받는 낮은 습지와 농경지로 남아 있었다. 대규모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목동 신시가지 조성 사업 이후다. 당시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도로망이 들어서면서 초원의 흔적은 지워졌고, 지금은 학원가와 아파트 단지 등 전형적인 신도심 풍경이 펼쳐진다.
+ 이야기 하나 더
목동 안양천 수변 길은 봄 산책지로 손꼽힌다. 안양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길게 이어지며, 5월이면 수양버들이 천변을 싱그럽게 만든다. 한때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던 벌판은 사라졌지만, 물가를 따라 트인 초록빛 공간만큼은 그 시절의 여백을 희미하게 전해 주는 듯하다.
글 이정은 일러스트 강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