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다루는 데도 칼의 감각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불 앞에서 단련한 손이 제철 복숭아를 쥐고, 육수를 내듯 향을 끌어내고, 접시 위에서 비로소 완성될 때.
파티스리의 문법이 아닌 요리 언어로 쓰인 디저트 신을 만날 시간이다.
박준우 셰프가 서울의 디저트 명가를 찾아 ‘서울 디저트 로드’를 연재합니다.
한식 디저트부터 유럽 정통 파티스리까지, 각 디저트에 담긴 철학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장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옥의 대표 메뉴인 타래 케이크.
국수처럼 뽑아낸 밤앙금 한 올 한 올에 셰프의 손길이 담겨 있다.
디저트 숍을 운영하는 나는 파티시에 출신이 아니다
제과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초콜릿 템퍼링을 수백 번 반복하며 손목 감각을 익힌 사람도 아닌 나는 요리사였다. 정확히는 요리하는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디저트 쪽으로 흘러든 사람이다. 처음엔 와인 바를 겸한 카페의 셰프였고, 타르트가 먼저 유명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디저트 하는 사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선물인지 숙명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나는 이 세계를 두 가지 시선으로 보게 됐다. 그리고 두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선명해진다.
‘셰프’라는 말의 뿌리
‘셰프(chef)’는 라틴어 ‘카푸트(caput)’, 즉 머리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 프랑스어로 건너오며 ‘수장’, ‘우두머리’가 됐고, 주방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파티시에(pâtissier)의 수장은? 셰프 파티시에(chefpâtissier)다. 언어의 뿌리를 따라가면 결국 둘 다 ‘셰프’다. 런데 어느 시점부터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셰프는 불 앞에 서는 사람, 파티시에는 밀가루와 버터를 다루는 사람. 그 분리에는 역사가 있다. 19세기 말,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사보이 호텔이나 리츠 파리 등 최고급 호텔 주방에 군대의 위계 구조를 이식하며 ‘브리가드 드 퀴진(brigade de cuisine)’을 완성했다. 이 시스템은 20개가 넘는 전문 직군을 계층에 따라 배치했는데, 생선만 다루는 포아소니에, 소스만 담당하는 소시에처럼 각자의 영역이 칼처럼 나뉘었다. 파티시에는 이 체계 안에서 모든 구운 과자와 페이스트리를 담당하는 독립된 파트로 자리 잡았고, 불랑제(제빵사)를 그 아래 두고 관리했다. 효율의 이름으로 주방은 철저하게 분업화됐고, 단맛과 짠맛의 세계는 그때부터 서로 다른 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닫은 문을 다시 열기도 한다. 1970년대, 폴 보퀴즈와 미셸 게라르를 중심으로 한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 운동은 에스코피에가 세운 엄격한 틀에 정면으로 맞섰다. 접시는 더 이상 웨이터가 서빙카트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방의 셰프가 직접 구성해 손님 앞에 내놓는 것이 됐다. 계절 재료를 전면에 내세우고, 소스는 가볍게, 조리는 짧게. 이런 원칙이 디저트 세계에도 스며들었다. 셰프가 접시 위에서 디저트를 완성하는 행위, 이른바 ‘플레이팅 디저트’는 바로 이 흐름에서 비롯됐다.
파티시에와 셰프, 두 가지 문법
가깝고도 먼 듯한 두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자. 파티시에는 재현(再現)의 예술가다. 레시피는 과학에 가깝고, 그램 단위의 정밀함과 온도 통제가 생명이다. 진열장의 타르트는 오늘도 어제와 같아야 하고, 한 달 후에도 같은 모양과 맛이어야 한다. 그 일관성이 파티스리가 쌓아온 신뢰다. 김영모과자점의 공고한 자리, 나폴레옹과자점의 클래식이 수십 년을 버티는 힘이 거기에 있다.
셰프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묻기 시작한다. 지금 제철 재료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생과일을 팬에 구워 캐러멜화하고, 육수를 내듯 향을 추출하고, 무스와 젤리로 식감에 레이어를 쌓는다. 아라 미뉘트(à la minute: 주문이 들어온 그 순간 주방에서 완성되어 손님 앞에 도착하는 것)는 셰프에게 법칙과도 같다. 그래서 셰프의 디저트는 진열장에 놓이는 대신 테이블 위로 바로 도착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라고 묻는 건 좀 잘못되었다. 두 문법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완성된 형태를 재현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다면, 후자는 재료가 가장 좋은 순간을 포착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다. 서울에서도 고바야시 스스무처럼 요리 테크닉을 단맛의 세계로 끌고 들어온 셰프들이 파티스리의 강호들 옆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른 자리를 만들어왔다.

“뭐가 들어간 거죠?” 신동민 셰프의 녹차 한 잔이, 박준우 셰프의 눈을 반짝이게 한 순간.
이 도시의 디저트 셰프들
가로수길의 당옥(糖玉)은 그 계보 안에 있다. 신동민 셰프와는 방송을 통해 오래 전에 처음 만났다가 재회한 것인데, 공간 곳곳에 한국 전통 기물이 놓인 당옥의 인테리어를 보며 ‘이 사람이 레스토랑을 꾸미는 방식으로 공간을 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셰프의 감각이 디저트 너머로 흘러나오는 것을. 부쩍 더워진 날씨에 시원한 커피부터 받아 들었다. 한 모금에 익숙하지 않은 깊이가 있어 뭔가를 넣었느냐고 물었더니, 무려 가쓰오부시라고 했다! 말하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가쓰오부시의 훈연 향과 감칠맛이 커피의 쓴맛 아래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게 요리사의 직관이다. 불과 육수와 재료를 다뤄온 손이 단맛의 세계에서 불현듯 꺼내 오는 조합.
더운 여름 날씨에도 사람들의 줄을 세우는 당옥의 복숭아 빙수가 그 실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고태령 농부와 직거래로 들여 온 복숭아는 2주마다 품종이 바뀐다.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대옥계·초황·천중도·엘바백도·엘바트가 계절의 흐름을 따라 순서대로 접시에 오른다. 같은 메뉴인데 방문할 때마다 다른 복숭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스카르포네 크림과 주레(젤리)를 곁들인 우유 빙수 위에서 물복·황도·백도가 각자의 당도와 식감을 선보이는 것. 이처럼 레시피를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는 방식은 전형적인 셰프의 문법이다.
당옥뿐 아니라 서울에는 요리 감각으로 단맛을 다루는 장소들이 조용히 늘어나고 있다. 코스 요리의 피날레처럼 구성된 플레이팅 디저트, 주방에서 갓 만들어 테이블에 도착하는 아라 미뉘트의 질감. 이를 경험하고 싶다면, 고정된 진열장 대신 셰프가 있는 주방을 찾아가면 된다. 특이한 재료 조합, 신선한 과일을 구워 올리는 방식, 젤리와 무스로 쌓는 식감의 레이어 등 파티시에의 빵집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접시들을 만날 수 있다.
두 세계는 경쟁하지 않는다. 파티시에가 쌓아온 정밀함이 없었다면 셰프가 파격을 선보일 기준도 없었을 것이고, 셰프들이 경계를 넘지 않았다면 디저트는 여전히 주방의 끝, 진열장 안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도시의 단맛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이유다. 에스코피에가 나눠놓은 두 개의 문이 서울에서는 나란히 열려 있다.
글. 박준우
벨기에에서 제과·제빵과 쇼콜라티를, 파리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과 <냉장고를 부탁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 출연으로 대중과 만났다. 스스로를 ‘셰프보다는 기자’라 불리길 원하는 그는 <맛있는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푸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현재 서촌에서 유럽 정통 디저트 카페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며 음식의 철학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이어가고 있다.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셰프 디저트의 언어
아라 미뉘트(à la minute)
주문이 들어오는 순간 완성하는 방식.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손님 테이블에서 처음 완성된다. 신선한 재료 상태를 최대한 살리는, 셰프 출신이 만드는 디저트의 핵심 개념이다.
플레이티드 디저트(plated dessert)
접시 위에서 구성되는 디저트. 1970년대 누벨 퀴진 운동과 함께 본격화됐으며, 무스·젤리·소르베·생과일 등 다양한 요소가 한 접시 위에서 조화를 이루는 현대 파인다이닝 디저트의 원형이다.
브리가드 드 퀴진(brigade de cuisine)
19세기 말 에스코피에가 군대 위계에서 착안해 설계한 주방 조직 체계. 이 시스템이 파티시에를 독립된 파트로 제도화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셰프’와 ‘파티시에’를 다른 직군으로 인식하는 기원이 됐다.
주레(gelée)
과즙이나 소스를 젤라틴으로 굳힌 젤리 형태의 요소. 파티스리보다 요리 세계에서 더 자유롭게 활용되며, 신선 재료의 맛을 농축해 식감에 레이어를 더하는 데 쓰인다.
셰프의 손끝에서 태어난 한 입
요리를 업으로 삼은 셰프가 디저트에 눈을 돌릴 때, 그 결과물은 조금 다른 결을 띤다.
계산된 풍미, 정제된 재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녹아든 오랜 시간의 감각.
셰프가 직접 운영하는 서울의 디저트 가게 세 곳을 소개한다.

정밀하게 빚어낸 동양의 단맛
당옥(糖屋)
국내 요식업계에 분자 요리를 처음 소개한 신동민 셰프가 일본식 디저트에 자신만의 언어를 입혔다. 가로수길 골목 안쪽의 당옥은 ‘단것을 파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달콤함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곳이다. 시그너처인 인절미 빙수는 마스카르포네, 키리(kiri), 고르곤졸라 세 가지 치즈를 신 셰프만의 비율로 만들어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팥을 길게 뽑아낸 타래 케이크와 가쓰오부시의 감칠맛을 더한 우마미 커피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메뉴다.
대표 메뉴 밤 몽실타래 치즈 케이크 1만9,500원 마스카르포네 인절미 빙수 2만8,000원 우마미 커피 4,500원
위치 강남구 신사동
인스타그램 @dangok_sinsa


식사와 디저트의 경계를 허물다
나우 남영(Nawoo Namyeong)
아는 이들만 아는 비스트로 와인 바 나우 남영.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에서 ‘키친갱스터’로 알려진 박지영 셰프와 임수화 파티시에가 의기투합해 만든 공간이다. 박 셰프는 요리와 와인을, 임 파티시에는 빵과 디저트를 맡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운영하는 만큼 서로의 취향과 피드백이 담긴 특색 있는 메뉴가 돋보인다. 대표 메뉴는 레몬 치즈 파스타와 식사를 마무리하는 티라미수다. 와인 바라는 이름이 주는 거리감과 달리, 이곳은 문턱이 낮고 편안한 밥집 같은 분위기를 지향한다.
대표 메뉴 레몬 치즈 파스타 2만4,000원 티라미수 1만 3,000원
위치 용산구 효창동
인스타그램 @nawoo_more.better


파인다이닝의 디테일을 담다
루드베키아(Rudbeckia)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스와니예의 이준 셰프가 선보이는 캐주얼 브런치 공간. 노란빛이 선명한 들꽃 ‘루드베키아’처럼 햇살을 가득 머금은 따뜻한 정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뉴욕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퍼세(Per Se)와 링컨(Lincoln)에서 요리 커리어를 다진 그는 과하지 않은 단맛과 균형 잡힌 텍스처로 조화로운 디저트 한 접시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프랑스 시골식 애플파이와 메이플 오트 라테의 조합은 시나몬 풍미와 고소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찰떡궁합 메뉴다.
대표 메뉴 호박밭 케이크 1만2,000원 프랑스 시골식 애플파이 9,800원 메이플 오트 라테 6,800원
위치 종로구 세종대로
인스타그램 @rudbeckia.seoul

글 이혜리 사진 심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