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예술을 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늘 중심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이 밀집한 거리, 이미 잘 알려진 문화 지구를 따라가면
그 도시의 예술 지형이 자연스럽게 보이곤 했다.
그런데 요즘, 서울이 그 공식을 조금씩 어긋나게 만들고 있다.
삼청동, 한남동, 심지어 성수동 일대 미술관과 갤러리까지 이미 다 꿰고 있는 친구들이 새로운 서울의 아트 신을 소개해 달라고 성화다. 런던, 파리, 뉴욕, 베를린에 사는 현지 친구들이다. 예전에는 내가 그들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요즘은 그 반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서울의 위상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BTS의 광화문 컴백 공연의 여파인지, 쏟아지는 DM에 답장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한때 우리의 예술적 허기를 채워주던 서구의 예술 도시와 오늘의 서울은 더 이상 같은 문장 안에 놓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서울은 이제 서구 아트 신을 추격하는 도시가 아니라 그들이 짜놓은 예술의 문법을 뒤집고 새로운 판을 설계하는 전복의 도시다. 그 징후는 지난 3월,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가장 먼저 포착되었다.

서울시 첫 공립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으로 3월 12일 개관한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도시의 가장자리에 등장한 새로운 미술관
전 세계 190여 개국이 지켜본 BTS의 광화문 컴백 공연이 서울의 현재를 송출했다면, 86세 할머니 아이돌 ‘신인호’의 금천구 독산동 출현은 서울의 가장 급진적 미래를 예언하는 사건이었다. 최고령 신인 아이돌을 태운 우주선이 착륙한 곳은 서서울미술관 뒤뜰이다.
이곳에 가려면 서울 도심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 1호선 독산역에 내려 아파트 단지와 구청 건물 사이 골목을 몇 분 걷다 보면 낮고 길게 누운 은빛 건물이 불쑥 나타난다. 처음엔 공공기관인지 문화 공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이 미술관의 정체성이다. 서울시립미술관 8개 기관 체계의 마지막 매듭인 서서울미술관은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답게 디지털·IT 산업 중심지 G밸리(G-Valley)에 자리 잡았다. 젠틀몬스터와 올리브영N 성수를 설계한 건축가 김찬중의 작품이지만, 도발적으로 시선을 강탈하는 대신 주민들의 삶에 완전히 스며드는,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을 했다.
미술관 유리창 너머로 맞은편 공원의 풍경이 펼쳐지고 원래 공원의 동선을 막지 않으려는 듯 곳곳에 통로를 열어두었다. 일상과 예술이 하나의 연속된 풍경을 이룬다고나 할까. 마음이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의 보폭까지 달리 헤아린 계단이야말로 서서울미술관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고, 그 서로 다른 삶의 속도가 이곳에서는 고르게 존중받는 듯하다.

LED 스크린에 투사한 ‘신인호’ 애니메이션. 작가의 외할머니를 모델로 한 86세 K-팝 아이돌 신인호가 등장하는 작업이다.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s. All rights reserved.
‘신인호’라는 새로운 서사의 등장
이 다정한 배려의 지층 아래에는 노동과 소외, 그리고 폐쇄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밤낮없이 돌아가던 미싱 소리와 어린 여공들의 마른기침이 뒤섞이던 1970~1980년대 ‘구로공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땅이 한때 얼마나 고단하고 빛나는 곳이었는지 알 것이다. 이후 공장이 지방과 해외로 빠져나가고 패션 아웃렛이 들어서면서 노동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고, 뒤이어 높은 담장 너머를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던 육군 도하부대가 주둔하며 이 일대는 오랫동안 서울에서 가장 ‘잠긴’ 동네로 남았다.
그 소외와 폐쇄의 연대기 위로 미디어 작가 얄루가 외할머니를 모델로 창조한 86세 아이돌 ‘신인호’가 등장한다. 산업화 시대에 지워진 여성 노동자의 삶을 전혀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되살린 이 인물은 쭈글쭈글한 주름과 굽은 등마저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뒤집는다. 셔터가 내려간 하역장과 잔디 마당에도 작품이 숨 쉬고, 미술관 건설에 참여한 익명의 얼굴 역시 전시 일부로 기록된다. 변방이라 불리던 동네가, 오랫동안 잠겨 있던 땅이 이제 서울에서 가장 앞선 이야기를 품은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비디오 설치 작품 ‘신인호 월드 투어’(2024).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s. All rights reserved.

서서울미술관 프로젝트V의 첫 번째 무대로 선보이는 ‘신인호 랜딩’.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s. All rights reserved.
서구 예술 도시와 다른 서울의 방식
해외 친구들에게 서서울미술관의 개관을 알리며, 서구를 대표하는 예술 도시와 서울의 다른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폐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의 성지 테이트 모던으로 탈바꿈시킨 런던이 산업 유산의 재생을 보여 준다면, 파리는 루브르와 오르세, 퐁피두 같은 미술관을 통해 도심의 역사적 권위와 문화적 중심성을 유지해 왔다. 뉴욕은 자본의 흐름에 따라 첼시와 브루클린을 오가며 미술 지형을 끊임없이 재편하고, 베를린은 폐기차역과 벙커 같은 공간을 예술 거점으로 전환하며 도시 전반에 창조적 에너지를 확산했다.
서구 주요 도시가 역사·자본·산업 유산의 축 위에서 예술 지형을 만들어왔다면, 서울은 조금 다른 방식을 택했다. 몇몇 유명한 곳에 집중하는 대신 노원구 중계동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도봉구 창동의 서울아레나 일대, 그리고 금천구 독산동의 서서울미술관처럼 시민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동네, 지하철 몇 정거장 더 가야 하는 그 ‘너머’에 예술 거점을 하나씩 심어왔다. 관람객이 미술관으로 가는 게 아니라, 미술관이 시민의 일상으로 걸어 들어오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서울시민은 동네 공원을 가로지르다, 혹은 마트 가는 길에 세계 수준의 예술과 예기치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기존 미술 지형을 단순히 복제하기보다 도시 외곽의 장소성과 결합해 예상 밖 장면을 만들어내는 서울은 이미 거대한 예술 실험실에 가깝다.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갈파했듯, 예술은 언제나 ‘가장자리’에서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것에 이름을 부여하며 시작된다. 서울 변두리를 결핍 대신 미래의 가능성으로 치환해 낸 이 정교한 그물망이 세계 미술 지형에 어떤 반전을 가져올지, 살아 움직이는 예술 좌표가 우리를 어디로 안내할지 즐겁게 상상해 본다.
글. 김지은
1992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 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와 뉴욕 크리스티 대학원에서 각각 예술학 석사를 마쳤다.
현대미술 서적 <디어 컬렉터>, <서늘한 미인>, <예술가의 방> 등을 집필했다. 예술과 스피치를 결합한 <아트 앤 스피치> 강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