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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의 결, 시간의 맛 서울에서 만나는 프랑스의 아침

버터의 결, 시간의 맛 서울에서 만나는 프랑스의 아침
2026.04

여행

취향의 발견

버터의 결, 시간의 맛 서울에서 만나는 프랑스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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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문자 지원

크루아상 한 조각에는 새벽이 접혀 있다.
어둑한 부엌에서 반죽을 밀고 접고, 또 밀고 접는 손길이 쌓여 만들어진 결.
입안에서 바스러지는 순간, 그건 단순한 빵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이 한꺼번에 녹아드는 경험이다.
봄의 초입, 서울의 비에누아즈리(발효 반죽으로 만든 빵) 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박준우 셰프가 서울의 디저트 명가를 찾아 ‘서울 디저트 로드’를 연재합니다.
한식 디저트부터 유럽 정통 파티스리까지, 각 디저트에 담긴 철학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장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프랑스인의 아침은 단순하다. 크루아상 하나, 커피 한 잔, 그리고 서두르지 않는 시간.

프랑스인의 아침은 단순하다. 크루아상 하나, 커피 한 잔, 그리고 서두르지 않는 시간.

고백하건대, 나는 크루아상을 가장 사랑한다

음식을 오래 다뤄온 사람으로서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디저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답은 언제나 같다. 크루아상. 화려한 앙트르메도, 섬세한 마카롱도 아닌 동네 불랑제리 어디서나 파는 평범한 초승달 모양 빵. 하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함정이다. 진짜 크루아상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 아침마다 동네 불랑제리에 줄을 섰다. 프랑스인의 아침 식사는 단것만으로 채우는 것이 불문율이다. 크루아상 하나, 팡 오 쇼콜라 하나, 혹은 바게트에 잼과 버터를 두껍게 바른 타르틴. 식사라기보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달콤한 의식에 가깝달까. 거기에 나는 늘 오렌지 주스를 곁들였는데, 그럴 때마다 현지인들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단맛과 신맛이 겹치는 게 그들의 아침 미학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크루아상만큼은 그 어떤 맛과도 경쟁하지 않고 홀로 빛나야 한다는 믿음. 어쩌면 수백 년간 만들어낸 프랑스식 완고함의 정체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완고함이 좋다. 타협하지 않는 맛에는 일종의 품위가 있으니까. 그 품위를 배우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그냥 맛있는 빵일 뿐이었으나 나중엔 그 안에 든 철학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크루아상 한 조각은 좋은 음악 한 소절처럼, 별것 아닌 하루를 조금 다르게 바꿔놓는다. 그게 내가 여전히 크루아상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다.

비에누아즈리라는 장르

비에누아즈리(viennoiserie)는 ‘발효 반죽으로 만든 빵’이라는 뜻이다. 183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 제빵사 아우구스트 장이 파리 리슐리외 거리에 불랑제리 비에누아즈(Boulangerie Viennoise)를 열면서 프랑스에 이 기술이 상륙했다.

오스트리아의 발효빵 문화가 프랑스의 버터 예찬과 만나면서 크루아상, 팡 오 쇼콜라, 브리오슈, 퀸아망이 탄생했다. 이 분야는 기술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결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버터를 반죽 사이에 끼워 넣고 수십 번 접어 수백 겹의 결을 만드는 라미나주 작업은 온도 관리 하나만 어긋나도 무너진다. 버터가 조금만 녹아도, 반죽이 조금만 과발효되어도 그 섬세한 결은 살아남지 못한다.

프랑스인이 이 빵에 자부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학교 1학년, 그러니까 열두세 살부터 직업교육 과정을 거쳐 파티시에의 길로 들어서는 아이들이 있는 나라다. 손에 처음 밀가루를 묻히는 나이가 우리 아이들이 수학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는 나이와 같다. 그 어린 손이 수십 년을 쌓아 만든 내공이 크루아상 한 겹 한 겹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한 입 베어 무는 일이 새삼스럽게 경건하게 느껴진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디저트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마카롱이나 마들렌보다 훨씬 광대한 세계라는 것이다. 에클레르, 밀푀유, 타르트, 글라스 등 장르 하나하나가 독립된 문명처럼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인이 일상적으로, 그리고 가장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비에누아즈리다. 특별한 날의 케이크가 아니라 매일 아침 빵집 앞에 줄을 서서 사는 빵 말이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그 일상에 프랑스인의 미식 철학이 담겨 있다.

프랑스인이 크루아상을 고르는 방식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하다. 우선 버터 크루아상(크루아상 오 뵈르)인지, 일반 크루아상인지부터 가른다. 전자는 버터 함량이 높아 결이 더 풍성하고 향이 짙다. 좋은 크루아상은 손에 들었을 때 묵직하지 않고, 한 입 베어 물면 결이 후드득 흩어지며, 그 순간 버터와 발효의 향이 동시에 치고 올라온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되 절대 눅눅하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 프랑스인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에게 크루아상은 아침의 기준치다. 그날의 빵집을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서울에서 프랑스 빵 문화의 씨앗이 뿌려진 곳은 서초구 서래마을이다. 1985년 서울프랑스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프랑스인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1990년대 프랑스 대기업들이 속속 한국에 진출하면서 정착 인구가 늘었다. 그들의 일상적 식문화 수요는 자연스레 골목 빵집과 비스트로를 하나씩 불러들였다. 낮 3시면 문을 닫고 쉬는 빵집, 아침마다 갓 구운 바게트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 서래마을은 한동안 서울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아침’을 흉내 낼 수 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 그 신은 이미 도시 전역으로 흩어졌다. 반포의 메종조, 성북의 뮈에, 강남의 꼼다비뛰드, 그리고 양재천의 크레미엘까지. 서래마을이 씨앗이었다면, 지금의 서울은 이미 꽤 무성한 숲이다.

맛있는 비에누아즈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미카엘·지수정 부부와 박준우 셰프. 무엇이든 토론하는 문화 또한 프랑스인의 습관이다.

맛있는 비에누아즈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미카엘·지수정 부부와 박준우 셰프. 무엇이든 토론하는 문화 또한 프랑스인의 습관이다.

양재천의 파리지앵

맛있는 크루아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는 내가 최근 발견한 곳은 크레미엘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이 크루아상을 서울에서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알랭 뒤카스의 파인다이닝을 비롯해 파리·런던·두바이·뉴욕을 누빈 파티시에 미카엘 메뇽 보에아와 지수정 부부의 원래 목적지는 맨해튼이었다. 셧다운된 도시 대신 고른 자리가 서울 양재천이었고, 별도의 커피 마시는 공간도, 요란한 홍보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지만 빵에 진심인 미식가들 사이에 금세 이름이 알려졌다.

봄기운이 움트던 그날, 지수정 셰프는 꽃 한 다발을 들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프랑스 공기가 느껴졌다. 인테리어 그 이상, 공간의 무드가 그랬다. 서두르지 않고, 좋은 것을 좋게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특유의 온도. 미카엘 셰프는 정착하기 이전에도 한국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다 팬데믹이 준 뜻밖의 선물이 이 나라와의 인연이 됐다고.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재난이 열어준 문으로 이런 사람이 걸어 들어오기도 하는구나. 크레미엘의 크루아상은 처음엔 낯설다는 반응도 있었다. 단맛이 강한 크루아상에 익숙한 서울 손님들에게, 당도가 없는 전통 스타일은 ‘이게 맞나?’ 싶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두 셰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진짜 크루아상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클래식을 고수했다. 나는 그 고집이 반가웠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을 믿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시간이 답을 냈고, 지금의 크레미엘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서울의 정통 비에누아즈리 맛집이 됐다.

크루아상 한 조각을 손에 들고 나선 양재천 변에는 봄볕이 물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버터가 결을 이루는 데 필요한 시간과 인내가 한 입에 고스란히 녹아드는 듯했다. 멀리 파리까지 가지 않아도, 이 도시의 봄날에 그 맛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좋은 건 결국 어디서든 자리를 잡는다는 것. 크루아상 한 조각이 나에게 그걸 다시 가르쳐줬다.


글. 박준우

벨기에에서 제과·제빵과 쇼콜라티를, 파리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과 <냉장고를 부탁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 출연으로 대중과 만났다. 스스로를 ‘셰프보다는 기자’라 불리길 원하는 그는 <맛있는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푸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현재 서촌에서 유럽 정통 디저트 카페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며 음식의 철학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이어가고 있다.

+ 알아두면 쓸모 있는 프랑스 디저트의 계보

프랑스 디저트는 크게 네 줄기로 나뉜다.
각각의 세계를 알고 먹으면 파티스리 진열장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비에누아즈리(viennoiserie)

발효 반죽 계열. 크루아상, 팡 오 쇼콜라, 브리오슈, 퀸아망처럼 버터와 이스트 반죽을 기반으로 한 빵과 과자. 매일 아침 불랑제리에서 구입해 먹는, 프랑스 일상과 가장 가까운 단맛이다. 기원은 오스트리아지만, 프랑스 버터와 만나 비로소 완성됐다.


파티스리(pâtisserie)

과자·케이크 계열. 슈 반죽(에클레르, 파리브레스트), 퍼프 페이스트리(밀푀유), 무스 케이크(앙트르메) 등 기술 집약적인 구움과자와 생과자를 총칭한다. 불랑제리가 일상이라면 파티스리는 축제에 가깝다. 파리의 파티스리 진열장 앞에서는 누구나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콩피스리(confiserie)

설탕 과자 계열. 캐러멜, 누가, 파트 드 프뤼(과일 젤리)까지, 설탕을 다루는 기술이 중심이다. 초콜릿을 다루는 쇼콜라트리(chocolaterie)와 함께 선물 문화의 핵심을 이룬다. 프랑스에서 선물용 봉봉 쇼콜라를 고르는 것이 예술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라스리(glacerie)

냉과 계열. 아이스크림(글라스)과 셔벗(소르베)을 전문으로 하는 분야로, 프랑스에서는 빙과류도 파티시에가 다루는 독립된 장르다. 여름철 파리의 글라시에 앞에 줄을 서는 광경은 비에누아즈리 못지않은 일상의 의식이다. 계절을 먹는 방식이 이토록 세분화된 나라가 또 있을까.

달콤한 파리를 서울에서 맛보는 법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서울의 수제 초콜릿 전문점 파리의 골목 어딘가에서 마주칠 법한 그 맛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프랑스 디저트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낸 서울의 디저트 가게 세 곳을 소개한다.

크레미엘 (Crémiel)에서 판매하는 빵

크루아상 한 겹에 담긴 파리의 고집

크레미엘 (Crémiel)

프랑스인 남편 미카엘과 한국인 아내 지수정, 두 파티시에가 함께 운영하는 양재동의 베이커리 크레미엘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직접 반죽한 크루아상 시트는 무항생제 달걀과 프랑스산 밀가루·버터만을 고집해 만든다. 이러한 정직함으로 블루리본 2개를 수상하기도 했다. 아낌없이 넣은 바닐라 빈 풍미와 묵직한 크림의 조화가 환상적인 플렁 파리지앵은 이 가게에서 가장 인기 많은 메뉴 중 하나. 달콤한 빵을 찾는다면 레이어마다 초콜릿이 스며든 팡 오 쇼콜라를, 진한 버터 풍미를 느끼고 싶다면 퀸아망을 추천한다.

대표 메뉴 플렁 파리지앵 7,000원, 팡 오 쇼콜라 6,000원, 퀸아망 5,000원, 아몬드 크루아상 7,500원
위치 양재동
인스타그램 @patisserie_cremiel

크레미엘 (Crémiel) 내부


루엘드파리 (Ruelle de Paris)에서 판매하는 빵

천연 효모가 빚어낸 시간의 맛

루엘드파리 (Ruelle de Paris)

‘파리의 골목’을 뜻하는 이름처럼, 서초동 골목에 자리한 루엘드파리는 번잡함보다는 깊이를 택한 베이커리다. 화려한 장식 대신 기본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프렌치 베이커리의 구조와 본질을 차분히 풀어낸다. 최고급 프랑스 밀가루와 노르망디 버터, 천연 효모종을 사용해 반죽한 빵은 저온에서 충분히 숙성해 깊고 단단한 풍미를 자랑한다. 대표 메뉴 크루아상은 겹겹이 살아 있는 결 사이로 버터의 고소한 향이 또렷하게 퍼지며, 기본에 충실한 베이킹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과한 장식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인, 루엘드파리만의 단단한 프렌치 베이커리를 만날 수 있다.

대표 메뉴 오리지널 크루아상 4,900원, 애플파이 6,500원, 갈레트 6,000원
위치 서초동
인스타그램 @ruelle_de_paris_official

루엘드파리 (Ruelle de Paris) 내부


뮈에 (Muet)에서 판매하는 빵

클래식 페이스트리와 화려한 비주얼의 조화

뮈에 (Muet)

북서울꿈의숲 인근에 자리한 페이스트리 전문점, 뮈에. ‘베이커리계 파인다이닝’을 지향하는 만큼 재료와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바삭한 크루아상 결을 그대로 살려 만든 리본 모양 ‘리본 페스츄리’는 뮈에를 상징하는 시그너처 메뉴. 이 밖에도 딸기와 초코, 모카 등 시즌별로 다양한 크림을 곁들인 베이커리 메뉴가 눈과 입을 만족시키니 빵지 순례의 필수 코스로 방문해 볼 것! 레몬 필링을 채운 봄 버전 ‘뉴문 크루아상’과 싱그러운 꽃 모양 ‘살구 플라워’는 시즌이 지나기 전 꼭 맛볼 것을 권한다.

대표 메뉴 뉴문 크루아상 9,000원, 리본 페스츄리 8,300원, 살구 플라워 8,500원
위치 장위동
인스타그램 @muet_coffee

뮈에 (Muet) 내부

이혜리 사진 심윤석, 방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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