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들이 숨 쉬고 갈등할 세계의 근간,
그 단단한 뼈대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미술감독은 이야기의 배경을 짓는 ‘신의 설계자’라 할 수 있다.
미술감독이 텍스트 속 찰나의 장면을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해 낸다면, 건축가는 그 상상을 거대한 실체로 빚어내어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건축가가 세워둔 견고한 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영화를 찍는다.
“누워 있는 글씨를 일으켜 세우는 자.” 종종 미술감독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고요히 잠든 시나리오 속 단어에 숨을 불어넣어 스크린이라는 대지 위에 골조를 세우고, 질감과 색을 입히고, 공간에 드리우는 빛의 각도와 그림자 길이까지 조율해 영화의 ‘무드(Mood)’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소명이다. 돌이켜 보면, 내게 건축은 그리 먼 세계가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 집안 어른이기도 했던 한 유명 건축가의 장례식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는 것을 보며 슬픔보다 먼저 막연한 경외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사촌들과 모여 도면을 그리는 놀이를 할 때면, 어깨너머로 그 선들을 좇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대학 시절엔 건축과 친구의 공모전 제출용 투시도에 음영을 넣어주곤 했는데, 그 작품이 대상을 받았을 때의 뜨거운 환호는 아직도 선명하다. 건축과 관련한 기억들은 일찍이 영화에 매료되어 있던 나를 자연스럽게 ‘미술감독’이라는 길로 이끌었다. 공간을 짓고 연출하는 DNA가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술감독 일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다. 나에게 서울은 시나리오를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방대하고도 완고한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로, 거대한 생물처럼 스스로 낡은 허물을 벗고 끊임없이 새로운 표피로 갈아입는 유기체 같았다. 스크린 속 세상을 짓기 위해 거리로 나가 도시의 표정을 읽기 시작했고, 이 숨 가쁜 소멸과 탄생의 반복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존재감을 지키는 ‘오래된 진짜’를 마주했다. 주변 풍경이 통째로 갈려 나가도 묵묵히 제 결을 유지하는 건축물들. 그 안에 숨겨진 거장들의 건축적 의도를 발견하고 그 공간이 지닌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은 서울에서 건져낸 나만의 ‘영감의 지형도’다. 그 지형도 위엔 명작이 즐비하다. 김수근 선생의 경동교회가 뿜어내는 요새 같은 위용과 디스토피아적 질감은 영화적 리얼리티의 근간이 되고, 특히 좋아하는 불광동 성당은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해 그 존재만으로도 묵상에 잠기게 한다. 나상진 선생이 설계한 꿈마루는 1970년대의 거친 질감 위에 조성룡 선생의 현대적 감각을 덧입혀 시간의 층위가 정직하게 드러난다. 김중업 선생의 서산부인과의원은 어떠한가. 생명의 탄생을 건축적 언어로 번역해 낸 그 둥근 벽면과 파격적인 형태는 건축이 이토록 자유로운 예술일 수 있음을 구현해 낸 상상력의 정점이다. 나는 그 기하학적인 실체에서 느껴지는 위풍당당한 유머를 사랑한다.
이 지형도 위에서 가장 각별한 성역을 꼽으라면, 마포 언덕 끝 절벽 위에 기품 있게 앉아 있는 절두산성당(순교 성지)이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빌 때면 여지없이 이 절벽 끝 성당을 찾는다. 이곳은 과거 ‘잠두봉’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봉우리로,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가 이희태 선생은 이 비극의 현장을 숭고한 예술로 승화했다. 갓 모양 지붕과 칼 모양 종탑, 그리고 전통 누각이 연상되는 팔각 화강석 기둥들. 오직 자연광의 흐름만으로 공간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어스름한 저녁 한강의 윤슬이 콘크리트 벽면에 반사되어 일렁일 때,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성한 무대가 된다.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대 후반의 일이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느라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다시 붙잡기 위해 절두산성지 ‘십자가의 길’을 돌며 일주일 동안 매일 세 번씩 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 벤치에 가만히 앉아 무심코 성당을 올려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강바람을 맞으며 절벽 끝에 서 있는 저 투박한 콘크리트의 살결, 고개를 푹 숙인 채 처연하게 내려앉은 지붕의 곡선, 도시의 소음이 거세된 정원의 적막 속에서 그 건물은 아무 말 없이 강물을 내려다볼 뿐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건축물의 형체가 건네는 가장 뜨거운 위로였던 것 같다. 건축은 때로 한 개인의 가장 깊은 슬픔까지 어루만지는 숭고한 미장센이 된다. 그 벤치에 앉아 듣던 청명한 새소리와 낮게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 소리, 십자가의 길 너머 보이던 한강의 물결, 강변대로 위의 정체된 차량 행렬까지. 그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절두산성지는 나에게 단순한 풍경 이상의 구원이 되었다.
그 구원에 힘입어 나는 훗날 내 대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영화 <소름>(2001)을 위해 말 그대로 ‘소름’ 돋을 만큼 낡은 것을 찾아 헤맸다. 당시 왕가위 영화 속, 시간의 레이어가 단단히 응집된 홍콩의 질감에 매료되어 있던 내가 마주한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금화아파트 단지였다. 1970년대에 지어져 산비탈을 따라 위태롭게 서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 그 거대한 세월의 부피에 압도당했다. 내부의 세트 디자인을 할 때, 나는 그 외벽이 품은 비릿하고도 뜨거운 질감을 세트 안으로 고스란히 끌어오고 싶었다. 그곳을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의 생(生)의 풍파를 상상하며, 세트에 겹겹이 시간의 층위를 쌓으며 드레싱 작업에 공을 들였다. 단순히 낡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퇴적된 시간을 복원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이제 재개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곳은 영화의 필름 속에 여전히 강렬히 남아 있다. 사라진 공간은 더 이상 말이 없지만 나는 그 공간이 품었던 냉기와 온기를 기억한다. 그 기억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여기에 남아 새로운 신을 설계한다.

김중업 선생의 대표작 ‘아리움 사옥(구 서산부인과)’. ⓒ 서울기록원

어린이대공원 안에 자리한 건축 걸작 ‘꿈마루’. ⓒ 서울기록원


비극을 예술로 승화한 절두산성당. ⓒ 서울기록원

현재는 사라진 금화아파트. ⓒ 서울기록원
글, 사진. 정은영
영화미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온 미술감독.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획자, 연출가 등으로도 활동한다.
최근작 <메스를 든 사냥꾼>, 기타 대표 작품으로 <처녀들의 저녁식사>, <소름>, <4인용 식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