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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한 알의 초콜릿, 그 달콤한 노스탤지어

설레는 한 알의 초콜릿, 그 달콤한 노스탤지어
2026.03

여행

취향의 발견

설레는 한 알의 초콜릿, 그 달콤한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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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문자 지원

초콜릿 한 알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언어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장인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다.
3월,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서울의 초콜릿 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박준우 셰프가 서울의 디저트 명가를 찾아 ‘서울 디저트 로드’를 연재합니다.
한식 디저트부터 유럽 정통 파티스리까지, 각 디저트에 담긴 철학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장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삐아프가 올해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선보인 초콜릿.

삐아프가 올해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선보인 초콜릿.

고백하자면, 나에게 초콜릿은 재료이기 이전에 풍경이다. 열아홉에 아버지를 따라 벨기에로 건너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건 브뤼셀의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라 골목마다 들어선 초콜릿 가게들이었다. 벨기에인들에게 초콜릿은 특별한 날 주고받는 선물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장례식장에서도 나눠 먹고, 일요일 오전이면 동네 쇼콜라티에에게 프랄린 몇 알을 사러 가는 게 자연스러운 나라. 생긴 지 100년이 넘은 초콜릿 가게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문을 열고, 할머니가 사던 그 가게에서 손녀가 같은 봉봉을 고르는 풍경 속에서 11년을 살며 제과와 쇼콜라트리를 배웠으니, 초콜릿은 내 청춘의 배경음악 같은 존재다. 지금 서촌에서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면서 디저트 메뉴에 초콜릿을 안 쓸 수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메르베유 위에 슬라이스한 초콜릿을 올릴 때마다, 벨기에 시골 마을의 파티스리에서 보았던 그 투박하고 정직한 과자들이 떠오른다.

카카오, 신대륙에서 서울까지

초콜릿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한다. 기원전 1500년경 올메카 문명이 카카오 열매를 으깨 음료로 마신 것이 시초로, 마야인들은 신의 음식이라 불렀고, 아즈텍에서는 카카오콩이 화폐로 통용되었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유럽에 카카오를 가져왔을 때, 그것은 쓰디쓴 음료였으나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든 건 유럽인들의 발명이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핫 초콜릿이 귀족의 아침 음료가 되었고,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고체 초콜릿이 탄생했다. 1912년 벨기에의 장 노이하우스가 속이 빈 초콜릿 껍데기에 가나슈나 프랄린을 채워 넣는 ‘봉봉 쇼콜라’를 발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급 수제 초콜릿의 원형이다.

한국에 초콜릿이 들어온 건 19세기 말, ‘저고령당()’이라고 음차해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러시아 공관원이 명성황후에게 양과자와 함께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대중에게 초콜릿이 본격적으로 퍼진 건 6·25전쟁 전후로 “기브 미 쪼꼬렛또”를 외치며 미군을 쫓아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 부모 세대의 공통된 기억일 것이다. 이후 1968년 해태제과와 동양제과가 기술제휴를 통해 국산 초콜릿 생산을 시작했고, 1975년 롯데제과가 ‘가나초콜릿’을 출시하면서 초콜릿은 본격적으로 대중 간식의 반열에 올랐다.

가나초콜릿은 지금까지 현역인 최장수 초콜릿이기도 하다. 이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정착하면서 초콜릿은 ‘고백의 도구’라는 상징성까지 얻었는데, 이에 화답하는 풍습인 화이트데이는 1978년 일본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이 기획한 것이 1980년대 한국에 건너온 것이다. 흥미로운 건 조선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칩 무렵, 가을에 주워놓은 은행을 남녀가 함께 까먹으며 사랑을 확인했다고 한다. 은행나무 암수가 가까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 데서 연유한 풍습이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봄은 사랑의 계절인 모양이다.

한때 한국 초콜릿은 뼈아픈 오명을 안았다. 시중 초콜릿 대부분 카카오버터 대신 팜유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짜 초콜릿’ 논란이 일었고, “한국 초콜릿은 개가 먹어도 안 죽는다”는 자조 섞인 농담까지 떠돌았다. 유럽에는 카카오버터가 없으면 초콜릿으로 분류조차 하지 않는 나라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팜유와 향료만으로 만든 제품도 버젓이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달고 팔렸다.

그러나 그사이 서울 곳곳에서 진짜 초콜릿을 만들겠다는 장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수제 초콜릿 만드는 쇼콜라티에들이 서울의 골목을 지키고 있다.

서울 초콜릿 신의 두 거목

서울의 수제 초콜릿 신을 이야기하려면 두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강남의 ‘삐아프’, 그리고 강북의 ‘카카오봄’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 두 곳이 서울 초콜릿 지도를 양분하고 있었다. 당시 삐아프가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선보였다면, 카카오봄은 벨기에 클래식을 고수하는 정통파였다. 세월이 흐르며 둘의 포지션은 묘하게 바뀌어 카카오봄의 고영주 대표는 현재 마포에서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 클래스 운영에 무게를 싣고 있고, 오히려 삐아프가 서울에서 클래식 초콜릿 매장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수년 전 방송 촬영 때 인연을 맺은 삐아프의 고은수 쇼콜라티에와는 이번 취재를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신사동 골목 안쪽, 주택가에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매장 문을 열면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이 흘러나오는데, 그 이름처럼 사랑의 노래가 감도는 공간이다. 보석처럼 가지런히 진열된 봉봉 쇼콜라를 직원이 은 접시에 한 알 한 알 올려주는 모습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다루는 의식 같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그만두고 초콜릿의 달콤한 세계에 빠져 에콜 르노트르에서 수학한 고은수 쇼콜라티에는 2011년 매장 문을 연 뒤 초콜릿 하나만으로 14년 동안 한길을 걸어왔다. 커피도 없고 오직 초콜릿만 판다. 

요즘 한국 디저트 신은 초콜릿의 변주가 한창이다. 두바이 초콜릿 열풍에 이어 지금은 카다이프와 피스타치오를 마시멜로 반죽으로 감싼 두바이 쫀득 쿠키, 이른바 ‘두쫀쿠’가 전국을 강타 중이다. 오픈런에 품절 대란, SNS 인증까지 초콜릿이라는 재료가 이토록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는 시대. 그러나 고은수 쇼콜라티에는 이런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클래식 봉봉과 프랄린의 세계를 지킨다. 마침 삐아프를 방문했을 때, 쑥·김·팥·깨 네 가지 한국 전통 재료를 담아낸 태블릿을 출시한 참이었다. 클래식을 고수하면서도 한국의 맛을 초콜릿 언어로 옮기는 시도. 이런 것이 진짜 변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좋은 초콜릿은 설렘을 부른다

좋은 초콜릿 고르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눈으로 본다. 광택이 고르고 표면에 블룸(하얀 반점)이 없는지. 이어 귀로 듣는다. 쪼갤 때 ‘딱’ 하고 깨끗하게 부러지는 소리. 이것을 ‘스냅’이라 하는데, 템퍼링이 잘된 초콜릿이라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입에 넣고 씹는 대신 혀 위에 올려놓고 체온으로 녹인다. 카카오 버터의 융점이 체온과 거의 같기에, 초콜릿은 입안에서 녹도록 설계된 거의 유일한 식품이다. 이 녹는 시간 동안 펼쳐지는 향의 레이어를 음미하는 것이 초콜릿 테이스팅의 핵심이다.

삐아프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어쨌든 초콜릿만큼은 설레는 게 맞다. 선물로 줄 때도, 내 돈 내고 사 먹을 때도. 예쁜 상자를 열 때의 두근거림, 포장을 벗기는 순간의 기대, 한 알을 골라 입에 넣는 그 짧은 의식. 초콜릿에는 사람을 다시 어린아이로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카카오라는 열매가 적도 근처 어딘가에서 자라 대양을 건너 쇼콜라티에의 손끝을 거쳐 내 혀 위에 도달하기까지. 그 긴 여정을 생각하면 한 알의 봉봉이 조금 더 경이롭게 느껴진달까. 이번 화이트데이에는 그런 마음으로 초콜릿 한 상자를 건네보면 어떨까. 달콤한 한 알에 당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들 테니.

고은수 쇼콜라티에의 조언을 얻어 초콜릿을 고르는 박준우 셰프.

고은수 쇼콜라티에의 조언을 얻어 초콜릿을 고르는 박준우 셰프.


글. 박준우

벨기에에서 제과·제빵과 쇼콜라티를, 파리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 준우승과 <냉장고를 부탁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 출연으로 대중과 만났다. 스스로를 ‘셰프보다는 기자’라 불리길 원하는 그는 <맛있는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푸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현재 서촌에서 유럽 정통 디저트 카페 ‘오쁘띠베르’를 운영하며 음식의 철학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이어가고 있다.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초콜릿 언어

템퍼링(Tempering)

초콜릿을 녹인 뒤 특정 온도까지 냉각했다가 다시 올리는 과정. 카카오 버터의 결정 구조를 안정시켜 광택과 스냅을 만든다. 잘 템퍼링된 초콜릿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으면서도 손에서는 쉽게 녹지 않는다.


봉봉 쇼콜라(Bonbon Chocolat)

한 입 크기의 초콜릿으로 껍데기(쿡) 안에 가나슈, 프랄린, 캐러멜 등 다양한 필링을 채운 것. 화이트데이 선물의 정석. 맛이 약한 것(화이트, 밀크)부터 강한 것(다크) 순으로, 부재료가 없는 것부터 견과류, 과일, 향료, 술이 든 순서로 맛보면 각각의 맛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프랄린(Praline)

캐러멜화한 설탕에 아몬드나 헤이즐넛을 섞어 곱게 간 것. 1912년 벨기에에서 탄생한 봉봉 쇼콜라의 대표적인 필링으로, 견과류의 고소함과 캐러멜의 깊은 단맛이 어우러진다. 벨기에 초콜릿의 정체성과 같은 존재.


가나슈(Ganache)

초콜릿과 생크림을 유화해 만든 부드러운 크림. 비율에 따라 트러플처럼 부드러울 수도, 단단한 센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과일 퓌레, 차, 향신료, 술 등을 넣어 무한한 맛의 변주가 가능하다.

서울의 초콜릿 장인이 있는 곳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서울의 수제 초콜릿 전문점 세 곳을 소개한다.
쇼콜라티에의 장인 정신과 섬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이곳들은 소중한 이들을 위한 선물은 물론,
나를 위해 특별한 사치가 필요한 날 방문하기 제격이다.

삐아프(Piaf) 초콜릿

완벽을 향한 고집, 초콜릿의 정점

삐아프(Piaf)

고은수 쇼콜라티에가 운영하는 이곳은 국내 초콜릿 애호가들 사이에서 ‘교과서’로 통한다. 2012년부터 ‘블루리본’을 연속 수상했고, ‘서울미식100선’에도 5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매 시즌 선보이는 창의적인 패키지와 정교한 맛의 밸런스로 유명하며, 특히 매년 밸런타인데이 한정판 세트는 ‘삐케팅’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인기가 높다. 프랑스 발로나 초콜릿을 베이스로 유자, 천일염, 산초 등 독특한 재료를 결합해 깊은 풍미를 완성한다. 초콜릿 하나하나에 담긴 완벽주의를 경험하고 싶다면 시그너처 메뉴인 천일염 초콜릿을 추천한다.

대표 메뉴 봉봉 10구 세트 3만5,500원, 더블 바닐라 3,400원, 천일염 초콜릿 3,400원
위치 신사동, 신세계 강남 스위트파크
인스타그램 @piaf_artisan_chocolatier

삐아프(Piaf) 내부


17도씨(17℃) 초콜릿 음료

카카오의 온도를 기억하는 공간

17도씨(17℃)

초콜릿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는 온도 17℃. 그 숫자를 상호로 내건 이 초콜릿 바는 2014년 연남동에 문을 열었고, 발로나 서클 V 골드 인증을 받은 몇 안 되는 국내 매장 중 하나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선택의 깊이에 있다. 초콜릿 음료만 네 단계로, 달콤한 맛부터 묵직하고 진한 맛까지 선택이 가능하다. 여름이면 등장하는 초콜릿 빙수는 매년 오픈 시즌을 기다리는 팬이 있을 정도. 카카오 함량과 원산지별로 구성된 다양한 초콜릿 라인업으로 카카오 본연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대표 메뉴 진짜 진한 초콜릿 음료 9,000원, 초콜릿 빙수 2만3,000원(시즌 한정), 초콜릿 봉봉 1구 3,300원
위치 연남동
인스타그램 @17dossi_chocolatier

17도씨(17℃) 외관


쇼콜라티끄(Chocolatique) 초콜릿 음료

연희동 골목의 작은 유럽

쇼콜라티끄(Chocolatique)

연희동 성당 근처, 간판이 없어도 단골은 찾아오는 초콜릿 가게. 이태희 쇼콜라티에가 홀로 운영하는 이 1인 공방은 합성 첨가물 없이 100% 수작업만을 고수한다. 계절마다 라인업이 바뀌는데, 직접 끓인 캐러멜에 소금을 더한 소금 카라멜 초콜릿은 사계절 변하지 않는 시그너처. 우유에 녹여 먹는 초콜릿과 마시멜로를 4회분으로 구성한 핫 초코 키트도 인기다. 콰트로 에피스(네 가지 향신료) 봉봉은 계피, 정향, 후추, 생강이 초콜릿 안에서 이국적인 화음을 이루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맛이다.

대표 메뉴 소금 카라멜 초콜릿 1만4,500원(8개입), 핫 초코 키트 1만8,000원(4회분 세트)
위치 연희동
인스타그램 @chocolatique_seoul

쇼콜라티끄(Chocolatique) 외관

이혜리 사진 심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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