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소식과 함께 겨울이 오면 서울 곳곳엔 실내외 스케이트장이 반갑게 문을 열었다.
발열 내의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은 코끝이 시려오는 찬 바람이 두렵지 않았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고 내달리며 맞이하던 그 겨울엔 한시도 웃음이 얼지 않았다.

서울의 한 스케이트장에서. 1984년 겨울. ©연합뉴스
놀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용돈은 늘 넉넉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밤낮없이 번쩍거리는 편의점이나 카페도 없었지만 겨울만큼은 특별했다. 매서운 바람이 불고 손끝이 시려도 “이불 밖은 위험해”라며 몸을 꽁꽁 싸매는 요즘과 달리 그 시절의 겨울은 ‘나가서 노는 계절’이었다. 친구들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가던 아이들의 발걸음은 빠르고도 가벼웠고, 골목 어귀까지 들리는 웃음소리는 꽁꽁 언 얼음처럼 맑았다.
1960년대 신설동에 공설 스케이트장이 개장했고, 효창운동장에도 스케이트장이 들어서 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겨울이 되면 서울 곳곳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다. 시내까지 나가기 힘든 사람들은 자연이 만든 얼음판, 그러니까 동네 개천이나 하천 또는 논바닥에 얼어붙은 물웅덩이로 향했다. 수려하게 조성된 인공 스케이트장은 귀했고, 자연이 만들어낸 무료 스케이트장이 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동네 공터는 나만의 작은 빙상장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스케이트에 대한 첫 기억은 거창하지 않았다. 동네 공터 한가운데에 있던 웅덩이는 겨울바람을 맞으면 천천히 얼음판으로 변했다. 그곳이 나의 첫 스케이트장이었다. 낙엽과 먼지가 박혀 있는 얼음 바닥은 매끈하지도 않았건만, 우리는 거기에 ‘우리만의 스케이트장’이라는 이름을 암암리에 붙여두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당시 용어)에 들어가기 전엔 썰매만으로 만족했다. 삼촌이 나무판자에 철사와 못을 박아 만들어준 투박한 썰매 하나로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또래 꼬맹이들 사이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엉덩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게 젖어도 얼음을 지치며 나아가던 그 오후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과 누나들이 신고 나오던 스케이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빙판을 가를 때마다 스케이트 날은 햇빛을 받아 빛났고, 사각거리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어머니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졸라댄 뒤 마침내 파란색 스케이트 한 켤레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 어른처럼, 동네 형들처럼 얼음 위를 쏜살같이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케이트 날이 무뎌서 자주 넘어져야 했지만, 넘어지는 것마저 즐거웠다. 얼음 위에서 우리는 넘어지는 법을 배웠고, 다시 일어서는 법도 배웠다.

1988년 겨울, 여의도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서울사진아카이브
야외 스케이트장은 매일매일 겨울 축제
좀 더 자라서는 여의도 샛강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제법 오래 버스를 타고 가야 했지만, 멀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집에서 멀면 멀수록 그곳은 더 특별한 곳처럼 여겨졌다. 겨울이 오고, 한강의 얼음이 얼었다는 소식과 함께 문을 열던 샛강 스케이트장은 갈 때마다 ‘축제 현장’ 같았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며 곳곳에서 “조심해요!”, “비켜요!” 하는 외침이 얼음판 위를 날아다녔다. 코가 빨개지고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도 사람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음판을 손질하는 시간이 되면 모두가 울타리에 매달려 기다렸고, 다시 “개장!”이라는 외침이 들리면 일제히 빙판 위로 쏟아져 들어갔다.
동네 스케이트장에선 좀처럼 즐길 수 없던 속도감에 추운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한번은 스케이트 끈이 풀려 넘어져 무릎이 까졌는데, 그 상처를 형에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이거 여의도 스케이트장에서 넘어져 다친 거야”라며 우쭐거렸던 적도 있다. 겨울은 그렇게, 아플 틈도 없이 즐거웠다.

1984년 12월 개장한 서울대공원 스케이트장.©서울사진아카이브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이성 친구
동대문에 자리했던 실내 스케이트장도 신기했지만, 1989년 모습을 드러낸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는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곳은 단순히 스케이트를 타는 장소가 아니라, 멋을 부리고 싶은 청소년들의 ‘무대’였다. 스케이트를 잘 타는 친구들은 자연스레 링크 한복판으로 나와 나름의 기술을 뽐냈다. 어떤 녀석들은 앙고라 털장갑에 목도리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빙판을 달렸다. 빙판 위에서 이성 친구와 몇 마디 나누는 일이 그즈음의 가장 큰 설렘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스케이트 날에 묻어온 얼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모습만 봐도 마음은 오래도록 훈훈했다
이제 한강은 겨울이 되어도 예전만큼 자주 얼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이 반갑게 문을 열고,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도 건재하다.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 날의 날렵한 소리는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고, 실내 스케이트장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소년·소녀들이 제2·제3의 김연아, 차준환을 꿈꾸며 돌고 뛰고 미끄러진다. 옛 시절 우리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아이들도 얼음판에서 자기만의 겨울 이야기를 마음껏 써 내려가기를!
글 정명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