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스친 장면이 삶의 방향을 살짝 바꾸는 날이 있다.
아무 일 없던 하루에 갑자기 빛이 번지는 것처럼. 그 조용한 조도의 변화가 내가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꿔놓았다.
수년 전, 어느 비 내리는 오후였다.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유 교수님이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다.
“정 PD, 어디예요?”
“저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에 있는데요.”
“아! 잘됐네요. 제가 지금 가까운 곳에 있어요. 오랜만에 얼굴 봐요. 지금 교보를 나와서 9번 마을버스를 타세요. 그리고 종점에서 내리세요.”
“그냥 종점에서 내리라고요?”
“그렇다니까요. 내리면 전화 주세요. 제가 나갈 테니.”
솔직히 전화를 끊고 나서도 상당히 망설였다. ‘비도 와서 집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두 가지 기준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그냥 집으로 간다. 마을버스가 늦게 오면 그냥 집으로 간다. 바깥에 나오니 비는 그쳤고, 게다가 바로 눈앞에 9번 마을버스가 나를 기다리듯 떡하니 서 있지 않은가. 일단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승객이 모두 내리 고 버스에 나만 남았을 때 기사님이 버스를 세웠다.
“기사님, 여기가 종점이에요?”
“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멍해졌다. 갑자기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비에 젖은 촉촉한 소나무, 그리고 저 멀리 우뚝 솟은 바위들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해 질 녘의 대기는 아련하고 신비로웠다. 풍경 전체가 가슴 설레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9번 마을버스의 종점은 수성동계곡이었다. 그때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인왕산 바위였다. 바위가 막 세수한 사람의 이마처럼 반짝거렸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 빛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내 눈 또한 그랬다. 우리의 눈이 빛에 반응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동안 시간도 잊고, 나도 잊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저 아래 골목에서 나를 부르는 유 교수님의 목소리였다.
“정 PD,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이쪽으로 내려와요.”
나는 교수님의 말과는 반대로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렸다. “정 PD, 청개구리예요? 왜 반대 방향으로 가요?” 수성동계곡이 생각나는 날이 있다. 비가 내리다 그친 날, 공기는 신선해지고, 아침에 챙긴 우산을 잃어버릴까 봐 긴장하는 날. 이렇게 서울 풍경은 내 삶에 합류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때부터 서울을 보는 내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뭘 찾고 있는지, 내가 뭘 원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르는 날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안다. ‘어쩌면 뜻밖의 아름다움이 느닷없이 펼쳐질지도 몰라!’ 그것만은 늘 원한다.
‘제일 좋아하는 곳’이 생겼다
그 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묻는다.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예요?”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부러운 사람 민규(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야생동물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어떻게 그 열정을 어른이 되어서도 유지할까? 너무 부럽다)에게 강서습지생태공원(이하 강서습지)에 대해 듣게 되었다.
“강서습지에 가면요, 한강의 파도를 볼 수 있어요.”
한강의 파도라고? 나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리고 부엉이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어요.”
부엉이 나무라고? 그런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몇 마리나?”
“제가 본 것은 네 마리. 하지만 열 마리 넘게···.”
“언제?”
“가지고 있는 옷 중 제일 두꺼운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
만사를 다 제쳐두고 강서습지에 가야만 했다. 나는 민규에게 부엉이 나무를 볼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망설였다.
“새들을 괴롭히는 사진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나는 절대 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강서습지 주차장에 도착하면 느티나무들이 심어진 광장이 있고, 습지로 들어가는 덱 길이 있어요. 덱 길로 들어가세요. 잠시 후 덱 길이 흙길로 바뀌고, 좌우로 샛강을 따라 버드나무들이 드리워진 습지가 나올 거예요. 거길 지나면··· 탁 트인··· 거길 지나면 저 멀리 메타세쿼이아나무들이··· 거길 지나면 바위가 하나 나오는데··· 거길 지나면 갑자기 풍경이 탁 트이면서 갈대밭이··· 동쪽을 바라보면···.”
어릴 적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읽고 보물섬 지도를 그려본 이래로, 그리고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본 이래로 이렇게 가슴 설레면서 지도를 외워본 적은 처음이다.


동물들, 특히 새가 많은 강서습지.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난 보물
나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 오후에 강서습지에 갔다. 그리고 이미 달달 외운 보물 지도를 떠올리며 부엉이 나무를 찾아보았다. 민규의 말 그대로 덱 길, 흙길, 샛강, 버드나무까지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부엉이 나무를 찾았냐고? 실패했다. 이유는? 내가 그만 모든 것을 더 찬란하게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오후의 햇살에 홀렸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색과 쉼이 나올까 싶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 모든 것이 한강의 콘크리트를 부분적으로 걷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주목하게 되면 그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강서습지를 그 뒤로도 계속 찾아가고, 그때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강서습지는 많은 동물의 서식지다.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하다. 강서습지는 한국에서 정말 보기 힘든 저지대의 습지다. 나는 고라니도 보고, 한강의 오리들도 보았다. 갈대숲 사이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을 맛보기도 했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도 보았다. 민규는 수달의 똥도 보았고, 살쾡이가 멧비둘기를 잡아먹은 흔적도 보았다. 그 흔적들이 바람에 날린다. 민규는 갈대숲에서 고라니와 마주치기도 했다. 민규는 부엉이를 바라보며 노을을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메리 올리버의 시 한 구절처럼. “죽음, 사랑, 야망- 큰 강물 속에서 펌프처럼 돌아가는 것들을 잊네/ 내 마음 휴식 속에서 고요해져 거의 느껴지지도 않네/ 사방으로 흐르는 작은 강들이 마음의 날을 무디게 만든 거지/ 시원하게 시원하게 뼈 위로 흘러가며.”(메리 올리버의 시 ‘개울’)
나는 강서습지 이야기를 하면 항상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보물 지도를 들고 강서습지에 갔는데 말이야···.”
글. 정혜윤 PD
CBS에서 인문 · 인터뷰 기반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방송인.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침대와 책> 등 에세이와 인터뷰집을 출간하며 작가로서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