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계절의 분위기나 경험을 살뜰히 챙기는 ‘제철 코어’에 진심인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제철만의 감성, 소비, 활동을 온전히 즐김으로써 현재의 소중함을 체감하고
능동적으로 나를 돌보는 제철 코어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에서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들에 ‘제철’을 붙이자 사는 일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제철 행복>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 해 스물네 번의 절기를 챙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베스트셀러다.
이렇듯 제철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절기마다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을 체크하고, 계절마다 꼭 가야 하는 ‘핫플’에 방문하고, 특정 계절을 연상시키는 취미나 이벤트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 이제는 아예 ‘제철 코어’라는 트렌드까지 등장했다. 제철 코어는 알맞은 시절을 뜻하는 ‘제철’과 핵심을 의미하는 ‘코어(Core)’를 결합한 신조어로, 특정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음식이나 행사를 만끽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일컫는다.
한편에서는 이런 흐름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스몰 럭셔리’ 트렌드와 연결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소비와 체험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특정 계절 한정이라는 희소성과 건강을 챙긴다는 이점까지 더해지면서 제철 코어는 단발적 유행을 넘어 젊은 세대의 또 다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9월의 제철 코어, 진한 모카 향 커피와 밤 맛 디저트를 사진에 담고 있다.

요즘은 버섯을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지만, 가을이면 그 맛과 향이 더욱 풍성해진다.

다양한 버섯을 활용한 파스타 한 그릇으로 미리 가을을 만끽해본다
제철 음식부터 제철 활동까지 지금은 ‘제철 시대’
길음동에 사는 김가인 씨는 얼마 전부터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있다. 원래 취미인 독서와 필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필사를 하면서 캘리그래피를 알게 되었어요. 좋은 문구를 쓰고 새기며 마음을 다지는 활동이라 사색의 계절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취미라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시작했어요.” SNS에 계절 기록을 남겨온 최선하 씨는 서촌의 카페 ‘풍류’를 찾았다. 카페 정원에 앉아 그가 주문한 것은 진한 모카 향 커피와 고소한 밤 내음이 코끝에 느껴지는 ‘만추’라는 이름의 디저트.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고 있어요. 개인적 체험도 중요하지만, 제가 느낀 계절 감각을 공유하기 위한 SNS 인증 사진은 필수예요.”
연남동에 사는 김민서 씨는 제철 재료를 이용한 요리로 유명한 동네 맛집 ‘노노스탄테’를 찾았다. 가을 별미인 모둠 버섯 크림파스타를 맛본 김 씨는 “표고, 양송이, 새송이 등 다양한 버섯을 활용한 파스타를 먹으니 꼭 가을 숲을 거니는 것 같았어요”라며 만족감을 보였다.
계절을 ‘타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다. 남구로역 부근에서 가죽 공방 ‘이비그’를 운영하는 류기준 씨는 가을이면 가죽 공예 체험을 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가죽의 따뜻한 촉감과 몸을 감싸는 온기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브라운, 캐멀, 버건디 같은 가죽 컬러들은 가을의 황금빛 낙엽과도 잘 어울리고요.”
흥미로운 점은 과거엔 주로 어른들이 챙겼던 제철을 이제는 MZ세대가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제철’ 해시태그는 10만여 건에 육박한다. #제철음식, #제철과일, #제철요리 등 세부 키워드까지 합하면 50만 건이 넘는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저속 노화, 혈당 관리 같은 건강 루틴으로 눈을 돌린 MZ세대에게 제철 음식은 젊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 예가 여름철 제철 과일인 토마토다. X(구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겉과 속이 다른 사과 되지 말고, 도마도(토마토)가 되자”라는 짧은 밈(Meme)이 공유되면서 여름철 토마토와 ‘솔직함’을 연결해 공감을 샀다. 이 밈의 인기가 굿즈로도 확산된 토마토는 Z세대가 제철을 놀이이자 콘텐츠로 소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제철 코어로 살아본 일주일>이라는 유튜브 영상은 조회 수 37만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가을을 흔히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을과 캘리그래피는 감성과 표현의 세계에서 깊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에요.
한 자 한 자 차분한 호흡으로 써 내려갈 때마다 가을이 손끝에 내려앉는 기분이죠.
몸 건강을 위해 제철 채소와 과일을 챙겨 먹듯 마음 건강을 위해 제철 활동도 챙긴답니다.”
_ 김가인

가을이라는 ‘계절 문화’를 대표하는 독서를 빼놓을 수 없다.

가을이 되면 더욱 인기가 높아지는 가죽 공방의 모습.
‘소확행’과 ‘아네모이아’가 만나 완성한 제철 코어
MZ세대가 제철 코어에 열광하는 배경에는 ‘아네모이아(Anemoia)’라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네모이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절의 분위기와 문화 요소 등에 대해 느끼는 향수를 의미한다.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등 사계절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특정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누릴 기회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이 평소 ‘소확행’을 추구해온 MZ세대의 성향과 만나 제철 코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사계절이나 절기가 흐려져가는 흐름 속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제철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는 먹거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과일 비싸다고 안 사 먹으면 죽어서 제사상에서나 먹겠지. 인생 별거 있나. 나에게 남은 여름은 100번도 안 된다.” X에서 한 사용자가 남긴 글은 1만 회 이상 인용됐다. SNS에서는 제철 과일뿐 아니라 제철 채소·해산물·나물 등을 정리한 리스트가 공유되고 있다. 망원시장에서 만난 송수현 씨는 “사과 재배지가 북상하면서 최근 몇 년 새 사과 가격이 많이 올랐어요”라며 “그래도 올해 먹는 사과가 가장 저렴한 사과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챙겨 먹으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제철 음식이 주는 ‘건강하다’라는 인식 역시 제철 코어를 자극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다. 몸에 좋은 것을 찾고 관리하는 ‘웰니스’, ‘저속 노화’ 트렌드가 MZ세대 사이에서 확산한 것도 제철 코어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을엔 가죽의 감촉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계절 문화’를 경험하는 느낌이에요.
특히 내 손으로 만드는 가죽 제품에는 그 애정이 더해지죠.
직접 경험하는 가죽 공예를 통해 계절의 깊이와 온기를 느껴보세요.”
_ 류기준
인기 검색어가 된 ‘벤치 독서’, ‘단풍 캠핑’
제철 코어는 특정 기업의 프로모션을 넘어 유통업계의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11번가는 최근 제철 코어 제품만 모아둔 ‘제철템 전문관’을 오픈했다. 당분간 늦여름과 초가을에 맞는 핵심 제품들을 선별해 선보일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철 식재료는 신선함뿐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못 먹는다’라는 한정성으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라며 “MZ세대의 ‘경험 중심’ 소비 패턴에 맞춰 계절 한정 제품 기획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계절 문화를 체험하는 건 ‘힙한 취향’으로 통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서점가와 도서관, 북 카페에서는 독서 열풍이 불고 있다. “평범한 독서 인증 사진보다 창가의 낙엽, 우드 톤의 북 카페, 공원 벤치나 단풍 길에서의 독서 인증 사진으로 계절감을 드러내는 게 관건이에요.” 대학생 유주현 씨의 말이다. 캠핑과 여행도 인기다. ‘가을 캠핑’, ‘단풍 캠핑’, ‘감성 캠핑’ 등 인기 검색어만 살펴봐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제철 캠핑 스타일을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캠핑 아이템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랜턴과 감성 조명, 우드 트레이 등 ‘감성템’이 인기다.

계절마다 열리는 ‘서울라이트 DDP’는 이제 유명한 ‘제철 코어 핫 스폿’이 되었다.

클래식만큼 가을이라는 계절과 잘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세종문화회관의 <누구나 클래식> 현장.
일시적 트렌드에서 문화로 발전하는 ‘제철 챙기기’
가을이 깊어지면 SNS에서는 #독서의계절, #낙엽책갈피, #스모키메이크업, #캠핑, #은행나무 같은 해시태그가 넘쳐난다. 제철 코어를 누리기 위해 지역 행사나 축제 정보를 알아보려는 움직임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는 ‘서울라이트 DDP’ 축제를 펼쳐온 DDP 관계자는 거대한 미디어 아트 작품이 DDP 외벽에 투사되는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 축제를 앞두고 최근 축제 기간과 장소를 묻는 문의가 많아졌다고 한다. “거대한 건축물의 표면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영상을 통해 이 계절의 리듬과 감각을 느낄 수 있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DDP는 SNS에서 ‘제철 코어 핫 스폿’으로 등극한 지 오래다.
가을을 맞아 클래식과 영화의 만남, 베토벤 스페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의 <누구나 클래식> 공연 기획 관계자 역시 “고요한 가을밤에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이 계절이 옷을 갈아입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제철 코어는 능동적으로 내 일상을 챙기는 방식
이렇듯 몸과 마음을 함께 챙기는 제철 코어 생활은 이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제철 코어 트렌드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더욱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배송 서비스를 이용해 전통시장에서 제철 채소와 수산물, 과일을 주문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미영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원은 “제철 코어의 유행은 건강·맛·영양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층의 선호와도 연결돼 있습니다”라며 “이는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제철 지역을 직접 방문하는 여행 감성이나 지역만의 특색으로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로컬리즘처럼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트렌드”라고 말했다.
계절의 생명력과 리듬을 알아챈 삶과 그렇지 않은 일상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다. 제철 코어는 그 생명력과 리듬을 포착하기 위한 작은 몸짓이자,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을 돌보고 더 깊이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지금, 누리기 좋은 서울의 ‘제철’이 도래하고 있다.

2025 서울어텀페스타
‘서울어텀페스타’는 가을철 서울에서 열리는 공연과 축제를 하나로 모은 통합 시즌형 브랜드로, 서울에서 열리는 공연·축제 사업 총 120개가 참여한다. 올해는 ‘공연 예술, 서울을 잇다’라는 슬로건으로 서울 내 주요 공연장과 서울광장, 청계천 등 시내 곳곳에서 공연 및 축제가 이어질 예정이다.
기간 10월 4일~11월 12일
장소 서울시 내 주요 공연장, 서울광장, DDP 등


서울거리예술축제 2025
추석 연휴에 서울광장과 청계천 일대에서 ‘서울다움’을 주제로 국내외 거리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청계천 복원 20주년을 기념해 청계광장부터 청계9가까지 시민이 함께 걸으며 공연을 즐기는 ‘아트레킹(Artrekking)’이 펼쳐질 예정이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거리 예술로 구현되는 서울다움을 누려보자.
기간 10월 6~8일
장소 서울광장, 청계광장, 청계천(1~9가)

한강페스티벌 가을
‘한강페스티벌’은 계절별로 한강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과 즐거움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사계절 축제다. 봄에는 가정의 달을 맞아 ‘봄에는 하하호호 한강’, 여름에는 ‘가성비 좋은 시원시원 열정 피서’를 주제로 한강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이번 가을에도 흥미로운 주제로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기간 미정
글 임지영 사진 김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