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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산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서울의 산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2025.09

에세이

서울의 소울

강레아

서울의 산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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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문자 지원

바위에서 바람을 견디고 빛을 기다리며 순간을 붙잡는 암벽등반 사진가, 강레아.
서울의 산을 오르내리며 사람과 바위, 하늘이 이어지는 장면을 담아온 그는 움직이지 않는 서울의 산이 어떻게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오게 하는지를 안다.

서울은 거대한 도시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북한산 인수봉이 눈을 맞추고, 하루를 마친 저녁에도 그 봉우리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운 좋게도 나는 10년 넘게 마치 늘 곁을 지켜주는 가족과 같은 그 풍경을 곁에 두고 살았다.

북한산 만경대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소나무. ©강레아

북한산 만경대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소나무. ©강레아

인수봉이 가르쳐준 것

스물네 살에 암벽등반을 배우며 북한산 인수봉을 처음 마주했다. 국내 최고의 암벽 루트를 품은 곳. 정상 높이는 800m 남짓이라 큰 산을 곁에 두고 사는 어떤 유럽인은 ‘야산’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인수봉의 기운은 결코 만만치 않다. 고도는 낮아도 늦은 봄 순식간에 겨울바람 이 몰아치기도 할 만큼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그곳에서 나는 ‘산이 허락해야만 산에 오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배웠다.
어느 봄날, 인수봉 어느 암벽 길에서 등반이 어려운 구간을 넘지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이 “내려와서 숨 좀 골라”라고 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자일에 매달려 눈을 감은 채 잠시 등과 머리를 바위에 기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봉우리에는 수많은 초록이 층층이 중첩돼 있었고, 신록이 능선을 따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듯했다. 그 순간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다가왔고, 나는 그 안의 미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북한산 도선사 뒤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은 어쩌면 호랑이도 보았을 것이다. 그 앞에서는 절로 겸허해진다. 나는 가끔 그 나무를 안으며 “꼬맹이 지나갑니다” 하고 인사한다.

가족 같은 서울의 산들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이런 산이 셀 수 없이 많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청계산, 관악산…. 동서남북으로 둘러선 산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녔다. 히말라야처럼 하나의 압도적인 존재가 아니다. 마치 엄마와 아빠, 성격이 다른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듯하다. 외국의 큰 산은 그 장엄함 때문에 교류의 언어가 크고, 한정적이다. 하지만 서울의 산들은 이야기가 많고, 그 언어가 다양하다. 어느 날은 다정하고 따뜻한 어른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변덕스러운 친구나 사랑스러운 연인 같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서울에서 저마다 다른 표정과 성격을 가진 산들과 매일같이 교류할 수 있다.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은 암벽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각각 수십 개의 경로를 품고 있고, 암벽등반가들은 그곳에서 실력을 다듬는다.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도심 가까이에 암벽 코스가 다양한 산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자연을 만나려면 며칠씩 시간을 내야 하지만, 서울에서는 아침에 오르고 오후에 내려와 식사를 하고 다음 날 다시 일터로 나갈 수 있다. 어느 해부턴가 한동안 12월 31일이면 남편과 인수봉 정상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 뒤 일출을 보며 한 해 계획을 세웠다. 겨울 산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별빛보다 화려했다. 롯데월드타워까지 이어지는 불빛을 보며 도시와 산이 이렇게 가까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서울의 산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

20여 년 전 어느 가을, 북한산성 입구에서 본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잡지 취재차 두 청년 클라이머와 함께 안전 로프 없이 바윗덩어리를 오르는 볼더링(Bouldering)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 계곡에서 목을 틔우려 온 소리꾼이 창을 하는 소리가 울렸고, 옆으로는 알록달록한 재킷을 입은 등산객들이 깔깔깔 소리를 내며 산길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그곳에 있는 이들이 산이라는 꽃에 이끌려 날아든 벌과 나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스로 산을 찾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산이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꽃이 피고 단풍이 들면 우리는 그 부름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사진 철학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계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의 거리는 먼저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이 움직이면 손가락이 움직여 휴대폰을 누르고, 마음이 더 가면 발이 움직여 그 사람에게로 간다.” 서울에는 그 마음이 닿는 순간, 발걸음이 자연스레 향하는 산이 있다.
그리고 그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글 & 사진. 강레아

암벽에 올라 산과 삶을 담는 사진가. 자연과 인물을 최소한의 색과 구도에 담은 작품들로 <산에 들다>, <소나무-바위에 깃들다> 등의 전시를 열었다. 지금은 속초에서 오디오씨(ODOC) 갤러리 카페를 운영한다

정리 원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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