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버스를 생각하면 ‘만원 버스’가 떠오르지만 흐뭇한 풍경도 많았다.
좌석에 앉은 승객은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받아주었고, 젊은이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며, 학생들은 첫사랑의 감정을 키우기도 했다. 지금보다 힘들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던 그 시절 버스 풍경.

줄을 서 시내버스에 오르는 사람들. 1984년. ©서울사진아카이브
40~50년 전 서울의 대중교통은 요즘처럼 쾌적하지 않았다. 지하철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버스는 골목부터 간선까지 골고루 사람들의 삶을 품고 둔탁하게 달렸다. 버스는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시장에서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아주머니, 들뜬 목소리로 친구와 수다를 떠는 여고생, 말없이 땀만 훔치는 넥타이 맨 아저씨, 손을 꼭 쥔 어머니와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그 안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눈빛을 교환하며 하루를 살아냈다.
‘만원 버스’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승객이 너무 많아 발끝 하나 제대로 내딛기 힘들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호흡과 땀 냄새를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짜증을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용케 자리에 앉은 승객은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의 가방을 받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젊은이들은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라며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 아득한 일상 한가운데에는 빠르게 승차권을 걷고 환하게 웃어주던 버스 여차장이 있었다. 그때는 여차장 대신 안내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속으로 만든 ‘토큰’은 1970~90년대에 현금 대신 사용된 버스 승차권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중고등학생들은 돈 대신 ‘회수권’이라고도 불렀던 종이 승차권을 내고 시내버스를 타곤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내리실 분 안 계시면 오라이~!
베레모에 깻잎 머리, 어깨에 멘 요금 가방 그리고 제복. 안내양 누나는 어린 마음에 대단한 존재로 보였다. 그는 사람들을 버스로 안전하게 밀어 넣고, 빠짐없이 요금을 받고, 동전을 잽싸게 거슬러주며 버스를 ‘운영’했다. 기사 아저씨와는 별다른 말 없이 눈빛만으로 호흡을 맞췄다. 안내양 누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쯤 “내리실 분 안 계시면 오라이~!”를 외쳤다. ‘오라이’는 ‘올 라이트(All Right)’의 일본식 표현이었다.
종일 버스 안팎에서 일하던 버스 안내양들은 ‘생활 전사’에 가까웠다. 버스와 정류장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바람 부는 계절에도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손님을 부르고, 안전을 확인한 뒤엔 힘껏 버스를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그때는 버스 요금을 안내양이 직접 받았기에 입금액과 승객 수가 맞지 않으면 더러 도둑 취급을 받기도 했다니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1982년부터 버스마다 정류장 자동 안내 방송과 하차 벨, 자동문이 도입됐고, 승객 스스로 요금을 넣는 자율 버스가 도입되면서 버스 안내양 제도는 점차 사라졌다. 현금 대신 사용하던 버스 승차권인 토큰과 회수권은 교통카드로 바뀌었다. 손을 건네는 풍경도, 눈빛을 맞추는 순간도 점점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그들의 빈자리를 마주하며 우리는 세월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했다.

‘버스 여차장’이 있던 서울 시영 버스. 1968년 9월. ©서울사진아카이브
불편하지만 따뜻함이 있었던 풍경
버스 안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흘렀다. 그중 가장 애틋했던 건 역시 첫사랑의 조짐이었다. 등굣길마다 같은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남고생과 여고생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버스 안에서 몇 정류장을 함께 가는 동안 창문에 비친 서로의 옆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가슴속엔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말과 함께 유행했던 어느 캔 커피 광고처럼 누군가는 일부러 시간을 늦춰 마음에 드는 이성과 같은 버스를 타기도 했다. 버스 안의 짧은 동행은 그 시절 청춘들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연애 방식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버스 유리창은 금세 뿌옇게 성에로 덮였고, 아이들은 그 위에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이나 마음에 드는 친구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누군가는 ‘하트(♡)’를 그려 넣기도 했고, 그 흔적은 다음 정류장을 지나며 천천히 사라졌다. 버스 뒷자리에선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고, 종종 기사 아저씨가 흥얼거리던 유행가가 승객들의 콧노래로 이어졌다. 때로는 회수권을 돌돌 말아 손가락에 끼우고 장난치던 학생들도 있었고, 토큰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그날 하루의 운세를 따져보던 삼촌과 숙모도 있었다.
교통카드와 자동문이 없던 옛날 버스에는 좀 더 고단한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버스는 모두가 잠시 함께하는 삶의 한 풍경이었고, 그 순간만큼은 작은 공동체처럼 서로를 돌보았다.

버스의 색을 선정하기 위해 시내버스에 견본 번호를 붙여놓은 모습. 1988년. ©서울사진아카이브
시간이 흘러 우리는 더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에 익숙해졌다. 막힘없이 전용 차로를 달리는 버스를 만났고, 최근에는 심야까지 도심을 관통하는 자율주행 버스에 몸을 실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근사한 흐름 속에서도 불편하고 서툰 시절의 버스 안 풍경은 잊히지 않는다. 지금의 저상 버스나 지하철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눈빛들, 표정들, 불편함과 온기가 함께 존재했던 그 시절의 삶. 가끔 그런 풍경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무릎 위 가방 하나, 유리창에 남긴 이름 하나, “오라이!”를 외치던 안내양 누나의 목소리. 그 시절의 따뜻했던 버스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 한쪽을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글 정명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