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과 공연은 더 이상 ‘어른들의 살롱 문화’가 아니다.
진입 장벽이 낮아진 클래식 음악은 특히 Z세대 사이에서 ‘힙하고 낭만적인 취미’라는 새로운 인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거리는 좁혀지고,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게 바뀐 ‘클래식힙’ 트렌드를 살펴보자.
©서울시립교향악단
“클래식 음악을 알고 나서 인생이 풍요로워졌어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힐링해요.” 어렵고 고리타분하다고 평가받던 클래식이 Z세대를 중심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클래식 음악 감상이 독서나 미술 전시 관람처럼 예술적 소양을 쌓는 ‘힙하고 낭만적인 취미’로 주목받고 있는 것. ‘텍스트힙’에 이은, 이른바 ‘클래식힙(ClassicHip)’이다. 클래식힙은 클래식 음악을 낭만적이고 ‘힙하다’고 여기는 문화적 경향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예술적 소양을 쌓는 것을 지향한다. 요즘 클래식 좀 즐겨본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나를 챙기는 시간’, ‘예술적 소양을 쌓는 활동’이라고 여긴다. 웅장한 공연장과 클래식 공연은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 고전적인 클래식은 대체 어떻게 ‘힙’해졌을까.
클래식 음악이 바꿔놓은 일상의 온도
“예술을 즐기는 시간은 곧 나를 챙기는 시간과 같아요.” 대학생 전찬미 씨는 한 달에 한 번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간다. 예전에는 고전음악·미술 같은 예술 분야를 생각하면 정적이고 어렵다는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공연을 경험하면서 인식이 달라졌다. “또래 친구들을 봐도 이전보다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내면의 교양을 쌓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팬인 그는 6월 지방 공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직장인 박진우 씨에게도 클래식 공연은 반복되는 일상에 색다른 활력을 주는 존재다. 그는 와인 모임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처음 눈을 떴다. “새로운 클래식 공연 소식이 올라왔는지 찾아보는 게 일과가 되었어요. 새로운 공연 소식이 뜨면 심장박동부터 빨라져요. 공연에 참석 가능한 지인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참석자 수에 맞춰 표를 예매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휴대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하고, 공연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기도 했다. 클래식이라는 ‘신세계’를 만난 후 인생 자체가 더욱 힙해진 느낌이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지향미 씨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오랜 팬이다. 국내 공연은 물론이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해외 공연에 ‘원정’을 가기도 하는 그는 자신이 조성진 팬덤의 일원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가격대가 꽤 있는 편이지만, 예매에 성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취감을 느껴요. 아티스트 때문에 클래식 장르에 빠진 건 처음인데, 덕분에 클래식 음악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원래 재즈와 영화 OST를 즐겨 들었다는 김진주 씨는 뒤늦게 클래식에 빠진 경우다. “자고 일어나면 상황이 변해 있는 세상에서 클래식 음악이야말로 변함없는 존재감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제 나름의 기준이자 도피처로 클래식 음악을 선택했어요. 특히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좋아합니다. 공연 예매에 성공해본 적은 없지만요.” 6월 예술의전당에서 있을 리사이틀 좌석을 아깝게 놓쳤다는 그의 소원은 언젠가 임윤찬의 연주를 1열에서 감상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통해 위안을 얻고 있어요.
관련 모임에 나가보니 자기 계발과 취향 탐색을 위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어느 쪽이든 클래식 공연을 가까이하게 된 건 긍정적 변화 아닐까요?”
_ 김진주
클래식힙을 이끈 젊고 매력적인 연주자와 콘텐츠
클래식 음악은 주로 중장년층 애호가들이 즐기는 문화라는 인식이 강했다. ‘오빠부대’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팬덤이 한국 클래식계에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2000년대 초반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등장이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연이어 제패한 미소년의 등장은 젊은 여성 관객들을 연주회장으로 불러 모았다. 2007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을 주축으로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앙상블 디토’는 아예 젊은 여성층을 타깃으로 만들어졌다. 뛰어난 연주 실력과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진 젊은 한국계 혹은 친한파 남성 연주자들로 구성된 앙상블 디토는 화보 촬영, 뮤직비디오 제작 등 클래식 연주 단체로서는 유례없는 마케팅을 펼치며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클래식힙의 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성진과 임윤찬 같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었다. 두 연주자는 세계적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두며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들의 공연 영상은 유튜브나 SNS를 통해 퍼졌고, 이를 통해 클래식에 입문한 Z세대가 늘어났다. 실제로 지난 4월, 임윤찬이 상주 연주자로 나선 지방의 한 국제 음악제는 개최 이래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클래식힙의 배경으로 클래식 음악 관련 유튜브 등을 통해 낮아진 진입 장벽을 첫손에 꼽는다. 유튜브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 영상들이 확산되면서 클래식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늘고 있다는 평가다. KBS교향악단 공식 유튜브 채널이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출연했던 강호동의 ‘어록’에 맞춰 작곡한 ‘클래식 패러디 콘텐츠’가 대표적 예다. 예능 장면과 실제 교향악단의 연주 영상, 악보를 절묘하게 합성해 편집한 이 영상은 젊은 구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제는 공연장을 찾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클래식힙’이에요.
클래식 공연 관람이 단순한 취미나 감상 차원을 넘어 개인의 교양과 취향을 드러내는 일종의 문화적 자기표현 수단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_ 박진우
예술의전당 공연 현수막에 소개된 아티스트를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클래식 팬들.
엘리트 문화도, 서브컬처도 아닌 하나의 ‘놀이 문화’
애니메이션 OST, K-팝, 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와 결합한 클래식 음악 공연이 많아진 것도 클래식힙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여기에 아이돌급 인기를 끄는 클래식 연주자들의 등장은 클래식 음악의 파급력을 높였다.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 평론을 해온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는 “조성진 팬층의 대다수는 기존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 새롭게 유입된 일반 대중”이라며 “특히 조성진의 음악보다는 조성진이란 인물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 기존 클래식 팬들과 구별되는데, 충성도는 훨씬 높다”라고 말한다.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 선우예권 등은 공연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티켓이 완판되는 클래식계의 ‘메가네임’들이다.
최근에는 클래식이 인기 콘텐츠 소재로도 뜨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클래식 플레이리스트 채널 <클래식 좀 들어라>다. <클래식 좀 들어라>는 신선한 큐레이션을 통해 영상 업로드 이후 약 8개월 만에 11만 명의 구독자를 끌어모으며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쇼트폼(Short Form), 일명 ‘숏폼’ 음원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클래식이 힐링용 음악 혹은 집중용 ‘노동요’로 각광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Z세대는 클래식 음악을 신선한 장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거든요.” <난처한 클래식 수업> 시리즈의 저자인 민은기 교수는 말한다. 느끼는 무게가 달라진 만큼 즐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젊은 세대는 피아노 리사이틀 관람, 플레이리스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긴다. 그리고 SNS 공연 후기를 통해 ‘치사량의 낭만’ 같은 신박한 표현들로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묘사한다. 언젠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조성진은 힙해지는 클래식, 팬덤을 거느리는 클래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클래식 음악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듣고 즐기고 사랑하는 음악이 되면 좋겠어요.”
지금 클래식 음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듣고 즐기고 사랑하는 힙하고 낭만적인 취미다.
금호아트홀의 클래식 공연을 찾은 학생들이 예매한 티켓을 찾고 있다.
+ ‘클래식힙’을 느낄 수 있는 서울 공연 3
2025 서울시향 강변음악회
여의도한강공원을 무대로 펼치는 야외 클래식 공연. 번스타인,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이 여름밤을 낭만으로 물들일 예정이다. 얍 판 츠베덴의 지휘 아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 신윤주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공연은 시민 누구나 선착순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일시 6월 13~14일 19시 30분
장소 여의도한강공원 물빛무대 앞 광장
가격 무료
누리집 seoulphil.or.kr
2025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과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인 얍 판 츠베덴과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앙상블을 만날 수 있는 공연.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박영희의 최근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로 시작해 벤저민 브리튼의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일시 6월 19~20일 20시
장소 롯데콘서트홀(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20일)
가격 S석 9만 원, A석 6만 원, B석 3만 원, C석 1만 원
누리집 seoulphil.or.kr
서울시무용단
K-아트의 정수로 꼽히는 공연으로, 종묘의 제향에서 추는 제례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선보인다. 50명의 무용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열해 펼치는 칼군무를 볼 수 있다. 2022년 초연 이후 세종문화회관 대표 레퍼토리가 된 <일무>는 뉴욕 링컨 센터 전석 매진의 신화를 쓰기도 했다. 정혜진 안무가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가 탄생시킨 감각적인 미장센도 눈여겨보자.
일시 8월 21~2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가격 스위트석 12만 원, VIP석 10만 원, R석 8만 원, S석 6만 원, A석 4만
누리집 sejongpac.or.kr
글 임지영 사진 김재형, 임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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