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에만 볼거리가 있는 도시는 그 매력이 한정적이다. 곳곳에 현지인이 즐겨 찾는 명소가 많고,
여행자가 그곳을 찾아가도 좋을 만큼 매력적일 때 그 도시는 계속 방문할 만한 도시로 인정받는다.
서울에서 음악과 술로 서울 사람들을 달래주고, 서울의 매력을 높이고 있는 이색적인 바(Bar) 네 곳을 소개한다.
재즈 연주자들의 성지인 ‘사운드독’.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당신이 생각난다고 가수 고(故) 김현식은 노래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아프고 저리면 별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찾는다. 그런 날이면 음악과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바(Bar)로 향한다.
좁은 골목 또는 복잡한 시장에 자리하며 서민의 슬픔을 달래주는 뮤직 바, LP 바, 재즈 바들이다. 왁자지껄한 아저씨들 사이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앳된 얼굴도 보인다. 오롯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작은공간은 잠시 세상만사를 잊게 해주는 평화의 전당이다.
골목 속 뮤직바, 을지로 딜런 & 신당동 딜런
뮤직 바 ‘을지로 딜런’
을지로 딜런 2호점인 ‘신당동 딜런’
서울 중구 인현시장은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골목안쪽으로 들어가면 안동집, 호남정 같은 정겨운 식당이 술꾼들을 반긴다. 인현시장과 접한 세운상가 쪽으로 나와도 마찬가지다. 넓적하면서 얇고바삭한 옛날 돈가스가 군침이 돌게 만드는 극동호프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2층에 ‘을지로 딜런’이란 뮤직 바가 있다.
바 이름이 을지로 딜런인 이유는 한규현 주인장의 별칭이 ‘딜런’이기 때문이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이 아닌,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실 밥 딜런도 딜런 토머스를 좋아해서 차용한 이름이라고 하니 밥 딜런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어쨌거나 을지로 딜런에 입장하면 흥겨운 록 음악이 들려온다. 이곳의 음악은 태반이 록 장르다.
벽에 걸린 커다란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손님이 요청한 유튜브 영상이다. 이곳에선 카카오톡에서 ‘을지로 딜런’을 친구 추가하고 유튜브 링크를 전달하면 주인장이 순서대로 들려준다. 무한대로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손님이 많을 때는 제한이 있다. 신청곡 수와 무관하게 금지된 노래가 있다. 클래식과 아이돌이다. 가게 방침이 그렇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분위기는 그날 손님이 누가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중년 아저씨들이 올드 팝송에 심취하거나 김광석과 산울림을 찾을 때도 있고, 요즘 인기인 젊은 록 밴드 새소년·실리카겔·터치드·한로로 등을 줄기차게 신청하는 이가 오면 그런 곡들이 메들리로 나온다. 삼삼오오 오는 이들도 있으나 혼자 오는 이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 속 주점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멀리 제주도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해외여행객이 오기도 한다.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다. 음악에는 종교도, 국경도, 민족도 상관없음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맥주는 셀프다. 직접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면 된다. 버드와이저와 아사히를 비롯해 거의 라거 종류다. 체코산 필스너 우르켈도 있다. 위스키와 칵테일은 주문하면 된다. 위스키 잔은 글렌캐런, 니트, 온더록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위스키는 종류가 너무 많아 메뉴판을 보면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주문 완료하면 멜빵바지를 입은 주인장 딜런이 가져다준다. 우유 과자나 초콜릿 안주는 덤이다. 따로 주문할 수 있는 안주로는 육포와 무지개색 치즈 같은 게 있다.
을지로 딜런 2호점이 신당역 근처에 생겼다. ‘신당동 딜런’이다. 신당역 5번 출구에서 이북집찹쌀순대를 끼고 들어가는 골목 속에 있다. 건물 3층에 자리해 올라가면 헉헉 숨을 내쉬게 된다. 신당동 딜런은 상대적으로 을지로 딜런보다 아담하다. 을지로 딜런은 투룸 구조인데, 신당동 딜런은 원룸 구조다. 메뉴 구성은 똑같다. 주인장 딜런은 신당동과 을지로를 왔다 갔다 한다. 을지로 딜런은 웅장한 록과 메탈이, 신당동 딜런은 애절한 발라드가 더 잘 어울린다.
이국적 풍경의 경리단길 LP바, 록시
이태원 경리단길 초입에 있는 ‘록시’.
“쿵쿵딱딱 쿵쿵딱.”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면 주인장은 늘 이런 드럼 비트로 시작하는 노래를 틀어주었다. 박력 있는 드럼과 단순하지만 경쾌한 전자 기타 소리가 인상적인 스웨덴 밴드 켄트(Kent)의 ‘소케르(Socker)’다.
켄트는 1990년 스웨덴 에스킬스투나에서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 밴드로, 2016년 12월 고별 공연을 기점으로 해체했다. 영국과도 다른 북유럽 분위기는 몽환적이다. 눈이 내리는 산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듯하다. 올 때마다 늘 이 노래를 신청하다 보니 옛 주인장이 입장 환영곡으로 틀어주곤 했다. 지금 주인장인 윤민호 대표는 이 노래를 틀어주지 않는다. 대신에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꽃미남 외모로 환영해준다.
이태원 경리단길 초입에 있는 ‘록시(Roxy)’다. 용산 미군 부대에서 대다수 미군이 떠나고, 지난 코로나19 사태에도 살아남은, 저력 있는 LP 바다. 미군은 떠났지만 이태원 경리단길은 여전히 이국적이다. 영어 학원에서 일하는 외국인 강사들이 아직도 해방촌에 거주하고 있어서 그렇다. 경리단길 초입에서 조금만 시장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쿵작쿵작하고 커다란 스피커에서 리듬감 있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Roxy’라는 영어 간판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진다. 고풍스러운 문을 열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어두침침한데 마치 거대한 노래방 같다. 다양한 색깔 조명을 쏴주는 선풍기 모양의 장치가 천장에 붙어 있고, 노래방에 있는 장치는 동그란 점 모양의 빛을 바닥에 발사한다. 유러피언 스타일로 높은 테이블과 탁자에 걸터앉을 수 있는 둥근 의자가 놓인 자리가 있는가 하면, 푹신한 소파가 있는 4인석도 있다. ‘힙한’ 곳을 찾아온 2030 세대부터 외국인까지 손님이 다양하다. 요즘 록이나 끈적한 리듬 앤드 블루스 음악이 흘러나온다.
LP 바답게 음악 신청은 옛날 방식이다. 종이를 받아 적어내면 DJ가 LP를 축음기에 올려서 틀어주기도 한다. 바 테이블 뒤로 수천 장의 LP판이 꽂혀 있다. 다만 신청하는 곡을 족족 다 틀어주진 않는다. DJ 맘대로다. 주로 외국 곡이 선택받는다. 가게 입구에 있는 룰렛 기계로 게임을 즐기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화살을 던져 맞히면 기계가 점수를 계산해준다. 생맥주는 레드락이 있고, 칵테일과 테킬라가 주력 주류다. 위스키도 있어 잔술로도 마실 수 있다.
한국의 맨해튼, 후암시장 재즈 바 사운드독
전문 재즈인과 아마추어뿐 아니라 외국 재즈인의 내한 공연도 만날 수 있는 재즈 바 ‘사운드독’.
골목 시장에 재즈 선율이 울린다. 후암동 재즈 바 ‘사운드독’은 재즈 연주자들의 성지다. 국내 전문 재즈인과 아마추어뿐 아니라 외국 재즈인의 내한 공연도 만날 수 있다. 조금 과장하면 뉴욕 맨해튼 재즈 공연장이 부럽지 않다.
사운드독의 최대 장점은 가까운 거리에서 아티스트의 공연 모습을 직접 보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연이 열린다. 평일은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 주말은 여기에 오후 6시 공연이 추가되기도 한다.
물론 재즈 바는 서울 곳곳에 많지만, 사운드독은 주인장의 재즈에 대한 ‘찐 사랑’이 압권이다. 주인장 김성 대표는 낮에 편의점에서 일하며 사운드독을 운영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주인장은 공연자들에 대한 대우를 중시한다. 가끔 마이크를 잡고 직접 재즈 뮤지션의 이력과 감상 포인트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공연을 관람하는 이들은 공연료를 1인당 2만 원가량 내야 한다. 임달균 같은 인기 있는 아티스트의 공연은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돌아온 임달균의 색소폰 연주는 재즈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와서 한번 듣고 “재즈 처음 듣는데 정말 좋네요”라고 손뼉 치며 환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공연은 주로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에 열리는 ‘잼 데이(JamDay)’다. 잼 공연은 간단한 코드 진행을 바탕으로 즉흥으로 합주하는 것을 뜻한다. 재즈 뮤지션들이 공연하면서 서로의 연주를 듣고 대충 코드 진행만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주고받듯 연주하는 형태다.
공연 수준은 전문 재즈 아티스트의 공연에 미치지 못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만나 펼치는 합주는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든다. 가령 예술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부산에서 온 드러머가 서울에 거주하며 피아니스트를 지향하는 공대생, 한때 음악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무명의 베이시스트와 합을 맞춘다. 이런 잼 공연을 이끄는 이는 기타리스트 박주원이다. 박주원 역시 임달균만큼이나 재즈계에서는 ‘네임드’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계급장 떼고 재즈를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괜스레 뭉클하고 재미도 있다.
생맥주는 아사히와 기네스가 있고, 병맥주 종류가 다양하다. 와인과 위스키 라인업도 빠지지 않는다. 식사가 될 만한 건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근처 분식집 간식마당에서 요기하고 와도 괜찮다.
서울의 뮤직 바, LP 바, 재즈 바 정보
을지로 딜런
주소 중구 퇴계로41길 47 2층 201·202호
영업시간 월~토요일 18시~2시, 일요일 18시~24시 ※ 변동 시 인스타그램에 공지하니 확인할 것
SNS instagram.com/euljirodylan
신당동 딜런
주소 중구 퇴계로78길 16 3층
영업시간 월~목요일 18시~2시, 금~토요일 18시~3시, 일요일 19시~24시
SNS instagram.com/sindangdylan
록시
주소 용산구 회나무로 9 지하 1층
영업시간 매일 18시~5시
SNS instagram.com/roxy_lppub
사운드독
주소 용산구 후암로35길 24
영업시간 월~일요일 18시~23시(공연 시간은 20시~22시)
SNS instagram.com/sounddog_jazz
글·사진 권오균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여행플러스’에서 5년가량 국내외 여행지를 취재하고 이를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겼다. 저서(공저)로 <시크릿 여행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