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번과 육즙 가득한 패티 그리고 미국의 정통 풍미에 한국적 감각이 더해진 햄버거가 미식가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이미지를 넘어 새로운 미식으로 자리 잡은 서울 속 미국식 버거를 찾아서.
햄버거는 이제 간식이나 별식을 넘어섰다. 주식의 한 계단에 편입된 듯하다.
130년 역사의 짜장면이 그렇듯이. “햄버거도 ‘고메’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어요. 한국에서 그게 통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파일버거’의 젊은 오너 셰프 윤상준 씨의 말이다. 그는 미국 요리 학교 CIA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활동했다. ‘보클리즈’라는 샌프란시스코의 파인다이닝에서 일하면서 ‘햄버거도 고급 미식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보클리즈에서 직원으로 일했어요. 비자를 내주었거든요. 그곳은 고급 레스토랑인데 햄버거를 팔았어요. 물론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 형태였죠.”
감자탕집에서 시작된 미식 버거의 여정
서글서글한 미남인 윤 셰프는 미국에서 고급 식당의 스태프로 일하다가 부모님의 호출을 받고 귀국했다. 감자탕집을 운영하시던 부모님의 가게를 얼떨결에 맡게 됐다. 파인다이닝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이 무렵 대중적이면서도 감각적인 햄버거를 생각하게 됐고, 여러 고려 끝에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됐다. 상호는 무언가 꼭꼭 맞게 채워 넣는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파일(Pile)’에서 따왔다. 햄버거에는 원래 없던 자리,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태원에서 시작된 햄버거의 한국적 변주
한국은 주로 미군에 의해 햄버거 문화가 전파되었다. 이태원은 햄버거의 성지였다. 미국식으로 ‘미디엄 레어 햄버거’가 선보인 곳도 이태원이다. 충분한 고객이 있었고, 품질 좋은 햄버거가 팔렸다. 반면 한국은 동시에 거대 브랜드 햄버거의 새로운 시장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생긴 대형 브랜드는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브랜드 롯데리아였다. 1979년의 일이다. 맥도날드는 생각보다 늦은 1988년에 들어왔다. 압구정 맥도날드는 수많은 강남 젊은이에게 큰 추억과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창때 압구정 맥도날드 앞은 만남의 장소였고, 그 햄버거의 맛은 미국 유학생과 한국, 더 나아가 한미를 잇는 어떤 연결점이기도 했다. 햄버거는 점차 한국화되기도 하고, 미국의 세련된 브랜드 또는 미국인만 알던 현지의 에이스들이 서울에 상륙했다. 쉐이크쉑이나 파이브가이즈 같은 브랜드들이다.
여기서 한국의 토종 브랜드인 맘스터치, 노브랜드 같은 회사도 가세하고 있다. 한국의 햄버거 시장 규모는 대략 3조 원대로 추산된다.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다. 오랫동안 정크 푸드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제는 일상의 음식, 나아가 더 감각적인 글로벌 음식으로 서울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던 우리가 언제부터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시게 되었던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세상은 빨리 바뀐다.
글로벌과 로컬의 조화, 서울 햄버거 시장의 진화
“클래식한 햄버거, 즉 패티와 약간의 채소, 소스가 들어가는 햄버거가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미국식 버거를 생각했던 저로서는 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할라페뇨와 캐러멜라이즈드 양파를 넣은 버거는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매달 새로운 버거를 내놓고 있어요. 버거는 생각보다 건강한 음식입니다. 탄수화물과 육류와 지방이 균형을 이루거든요. 다만 함께 곁들이는 프렌치프라이나 당이 많이 들어간 음료가 주로 문제를 일으키곤 하죠.” 한때 서울에도 테이블에서 썰어 먹는 고급 버거가 인기를 끌었다. 20여 년 전 활동했던 크라제버거는 가게를 늘려가면서 새로운 버거로 화제를 모았다. 그 후에도 이 시장을 노리는 영리한 회사들이 작은 브랜드이지만 좋은 품질로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파일버거도 그런 회사 중에서 더 감각적이고 미식의 선이 살아 있는 버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격은 대형 브랜드와 별 차이가 없다. 그 때문에 이렇게 셰프들이 개성을 가지고 만드는 버거의 시장성이 높아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버거는 패티가 튀긴 치킨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실 버거라는 건 소고기 패티가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에 ‘치킨버거’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틀린 용어라고 한다. 빵 사이에 무얼 끼웠다는 뜻에서 치킨 샌드위치에 더 가깝다. 하지만 용어야 어떠랴. 한국은 프라이드치킨 강국이고, 그걸 빵에 끼워 버거로 파는 힘이 있다. 이 가게에도 그 메뉴가 있다. 바삭한 닭의 힘이 느껴진다. 햄버거는 미국의 상징이다.
맥도날드가 드라이브스루, 즉 차에 탄 채로 주문하고 받고 먹을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은 것이 이미 반세기도 넘었다. 그만큼 미국은 햄버거 시장을 선도했다. 가장 미국적인 음식이었고, 그만큼 큰 도전도 받았다. 이제는 세계인의 표준적인 음식이 되었다. 한국도 불고기버거를 위시해 김치버거, 매운 프라이드치킨버거 같은 새로운 버거를 전 세계를 대상으로 내놓는다.
파일버거가 그리는 미식의 미래
파일버거의 메뉴는 생각보다 값이 싸다. 대형 브랜드와 유사한 가격이다. 햄버거가 갖는 한계라고 그는 생각한다. 햄버거는 비쌀 수 없다는 고정관념과 싸우고 있다. 그는 자기 햄버거를 좋은 가격에 내놓을 계획이다. 고메 햄버거도 비싸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윤도 이윤이지만 더 많은 이가 파일버거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선하고 차분한 표정, 번뜩이는 재치와 뛰어난 기술이 들여다보이는 젊은 셰프의 햄버거 도전기를 우리는 계속 보고 싶다. 서울은 어느 음식이든 다 수용하는 포용력이 있는 도시니까. 그는 이 도시를 잘 골랐다. 샌프란시스코가 그랬듯이 서울도 그런 도시다.
미국의 지역별 버거 스타일
미국은 지역마다 독특한 버거 스타일을 발전시켜왔으며, 각 지역의 문화와 식재료에 따라 다양한 버거가 탄생했다.
미국 내 지역별 버거의 특징을 소개한다.
그린 칠레 치즈버거(Green Chile Cheeseburger)
뉴멕시코산 그린 칠레를 패티 위에 얹어 매콤한 풍미를 더한 버거. 지역 특산물인 칠레가 매력적인 조화를 이뤄 남서부 스타일을 대표한다.
프리타스 쿠바나(Fritas Cubana)
돼지고기와 초리소(소시지의 일종)를 섞은 패티에 감자튀김과 양파를 얹은 쿠바풍 버거다. 플로리다의 이민자 문화가 녹아 있는 독특한 맛이 특징이다.
주시 루시(Juicy Lucy)
미네소타에서 먹는 버거로, 패티 속에 치즈를 넣고 구워 한 입 베어 물면 녹아내리는 치즈가 일품이다. 단순하지만 치즈와 패티의 조화가 풍부한 맛을 선사한다.
피멘토 버거(Pimento Burger)
피멘토 치즈를 얹어 매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남부 특유의 풍미를 잘 보여주는 버거다.
루터 버거(Luther Burger)
조지아에서 많이 먹는 도넛을 번으로 사용해 단맛과 짠맛의 조화를 이루는 버거. 독창적이고 과감한 조합이 특징이다.
버터 버거(Butter Burger)
패티와 번에 버터를 넉넉히 바른 후 구워 고소한 맛을 더했다. 버터의 풍미를 통해 위스콘신의 유제품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 느끼는 진한 미국의 맛
육즙 가득한 패티와 고소한 치즈, 풍성한 토핑의 햄버거가 미국 본토의 맛으로 평가된다.
서울에서 정통 미국식 햄버거를 즐길 수 있는 식당 세 곳을 소개한다.
#섬세한 맛과 경험을 겹겹이 쌓는 수제 버거
파일버거
‘파일버거’는 미국 요리 학교 CIA 출신 윤상준 셰프의 섬세한 터치로 탄생한 수제 버거 맛집이다. 대표 메뉴인 파일 시그너처 버거는 치즈와 베이컨, 캐러멜라이즈드 양파, 어린잎, 아이올리 소스의 조화로 ‘단짠’의 매력을 선사하며, 여성 고객들이 좋아하는 바질 버거는 바질 소스와 발사믹,토마토와 모차렐라로 신선한 카프레세 샐러드의 풍미를 담고 있다. 큼직한 치킨 패티와 청양마요의 매콤함이 돋보이는 ‘저세상 치킨버거’도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이드 메뉴인 가지튀김은 ‘겉바속촉’의 정석이며, 감자튀김은 다양한 소스와함께 맥주와 환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깔끔한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로 꾸민 파일버거에서 고급스러운 미국식 수제 버거의 매력을 느껴보자.
인스타그램 @pileburgers
가격 파일 시그너처 버거 1만500원, 파일 버거 7,500원, 바질 버거 9,900원, 저세상 치킨버거 9,800원, 가지튀김 5,000원
#미국 빈티지 소품으로 꾸민 버거 가게
플렉스버거
숨은 맛집이 가득한 공릉동에서 유독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플렉스버거’는 스매시드 버거 스타일의 미국식 수제 버거 맛집이다. 미국에서 직접 공수한 빈티지 소품들로 꾸민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며, SNS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입소문을 타며 더욱 유명해졌다. 직접 만든 소스와 정성이 담긴 패티가 조화를 이루며, 클래식한 맛이 돋보이는 플렉스 버거와 파인애플·페퍼로니가 어우러진 블랙 번의 와이키키 버거가 특히 인기다. 칠리치즈 프라이와 과카몰리 살사 프라이 같은 사이드 메뉴도 두툼한 감자튀김과 함께 버거와 잘 어우러진다. 가격 또한 합리적인 맛집이니 미국식 버거가 생각난다면 플렉스버거를 방문해보자.
인스타그램 @flexburger2021
가격 플랙스 버거 7,400원, 와이키키 버거 9,300원, 과카몰리 살사 프라이 8,000원, 스파게티 4,900원
#미국 감성 충만한 연희동 맛집
링키지버거
연희동에 위치한 ‘링키지버거’는 신선한 소고기를 직접 손질해 패티의 육즙과 식감을 살린 수제 버거를 선보인다. 미국의 작은 버거 가게를 연상시키는 키치한 포스터가 벽을 채우고, 오픈 주방 앞 바 테이블에서 셰프들의 요리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를 더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대표 메뉴인 링키지 버거는 소고기 패티에 치즈·베이컨·적양파·토마토·로메인과 수제 소스로 기본의 맛을 살리며, 느타리버섯과 트러플 오일이 어우러진 머시룸 버거도 꾸준히 사랑받는 메뉴다. 사이드 메뉴인 ‘연희프라이즈’는 볶은 고기와 핫소스로 매콤한 풍미를 더하며, 진한 우유 맛이 일품인 셰이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함으로 감자튀김과 함께 ‘단짠’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인스타그램 @linkageburger
가격 링키지 버거 9,900원, 머시룸 버거 1만900원, 불고기버거 1만900원, 연희프라이즈 7,500원, 바닐라 셰이크 6,500원
글 배효은 사진 최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