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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피카디리 앞에서 만나

이번 주 토요일 피카디리 앞에서 만나>
2024.09

에세이

레트로 서울

이번 주 토요일 피카디리 앞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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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이 하나뿐인 단관 극장은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변신했지만 결국 사라져갔다. 1958년 단관 극장으로 시작한
충무로 대한극장 역시 올 9월 말 영업을 마칠 예정이다.
하지만 단관 극장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단관 극장은
여전히 ‘상영 중’이다.

프렌치 키스 페스티벌

1995년 7월.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에서 영화 <프렌치 키스>를 위한 ‘프렌치 키스 페스티벌’이 열려 많은 인파가몰 렸다.
©연합뉴스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고, 도시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조용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단관 극장, 낭만의 성전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오래된 기억 속에 묻힌 단관 극장은 필자뿐 아니라 1980~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에게는 여전히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절친했던 대학 동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가족 경조사와 관련된 소식이려니 했는데, 녀석은 조부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축 처진 목소리로 대뜸 얘기했다. “대한극장도 없어진다더라.”

학창 시절부터 영화광이라 자부했던 우리에게 극장은 대학 졸업 후 하는 일이 달라졌음에도 드문드문 좋은 영화 한 편과 함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 대한극장뿐만이 아니었다 . 일찌감치 사라진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 하지만 충무로와 을지로, 종로3가로 이어지던 그 멋진 추억의 장소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며 멀티플렉스로 전환을 꾀했지만 21세기의 문턱을 제대로 넘지 못하고 하나둘 간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충무로의 상징 대한극장도 66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오는 9월 30일 문을 닫는다.

1990년대 후반 멀티플렉스 시대가 자리 잡기 전까지 극장이라고 하면 한 작품을 한 극장에서만 개봉하는 단관 극장이 보통이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극장 앞에 줄을 섰다. 인기 영화의 경우 극장 앞에는 암표상이 은밀하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예매가 가능해진 무렵부터는 며칠 전 한 번 더 시내 한복판의 극장을 다녀가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황제>와 <백 투 더 퓨쳐>를 봤고, 명보극장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봤다. 스카라극장에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단체 관람했고, 국도극장에선 에 감동했으며, 피카디리극장에선 <타이타닉>과, <접속>을 만났다.

한번은 단성사에서 웃지 못할 경험을 했다. 개봉일부터 매일 극장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던 <서편제>를 주말에 가족과 함께 편히 보려고 나흘 전 단성사에 들러 표를 예매해두고 토요일 당일에 극장을 찾았다. 그런데 우리 좌석에 다른 관객들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표를 들이밀며 따졌는데, 알고 보니 내가 예매했던 입장권에 찍힌 날짜는 토요일이 아닌 그 전날이었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했는데, 다행히 어머니 대신 동행한 누나의 남자 친구가 극장 관계자에게 얘기를 잘해서 복도 끝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볼 수 있었다. 그때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극장을 탓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어수선한 분위기인지라 스크린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도 중반 이후 <서편제>의 소리와 가락에 빠져들며 눈이 붓도록 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영화에 몰입해서였는지, 그때 내 상황이 부끄러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며칠 뒤 <서편제>는 대한민국 영화 최초로 100만 명 관객을 돌파했다.

20세기 소년 소녀들에게 단관 극장은 단순한 영화 상영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성장과 상상의 장소였으며, 작은 발걸음이 커다란 꿈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다. 극장 앞에 서면 마치 시간의 문이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우리는 극장 앞에서 친구와 만나고, 가족을 기다리고, 연인과 헤어지기도 했다.

단관 극장 안은 대체로 단순했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 진정한 영화의 마법에 사로잡히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유튜브와 OTT는커녕 인터넷조차 없던 시절 영화는 독보적인 문화 콘텐츠였고, 극장은 20세기 소년 소녀들이 마음껏 설레고 기대하며 현실 너머로 상상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허락된 세계였다. 아쉽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단관 극장은 점점 사람들의 일상 밖으로 밀려났다. 언젠가부터 극장이라는 공간은 낮은 조명과 교감 대신 새로운 빛과 소음으로 채워졌다. 21세기 스타일의 화려한 멀티플렉스에 적응하며 여전히 영화를 즐겨 보고 있지만 , 그 시절 단관 극장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영화와 그 속에서 느꼈던 격렬한 감정들이 가끔씩 먼지를 털어내며 반짝이기도 한다. 당연한 일 아닐까. 그 시절 극장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으로 존재하며 저마다의 추억과 성장의 역사를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와 영화 카드는 단관 극장의 주요 홍보 수단이었다.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정명효(전 파람북·베가북스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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