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부터 찹쌀떡, 강정, 누룽지까지 까맣게 옻칠한 할머니의 자개 장식 찬합 속에 들어 있을 것만 같은
추억의 간식이 뜨고 있다. 세대와 문화를 초월해 거센 인기몰이 중인
‘뉴 할매니얼’, K-디저트 열풍을 짚어봤다.
‘추억’ 찾는 구세대와 ‘건강’ 찾는 신세대의 만남
강남역 근처 회사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최효정 씨는 퇴근 후 약속을 ‘촌스러운’ 다방에서 잡았다. 주변의 세련된 프렌치 또는 이탤리언 카페를 마다하고 평화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딱 하나, 요즘 꽂혀 있는 ‘복고풍’ 때문이다.
“옛날 간식 메뉴들이 맛있다는 후기가 즐비해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요. 망설임 없이 이곳을 콕 집었어요.” 같은 다방을 찾은 20대 직장인 박연기씨 또한 이곳을 찾아 추억 속 음식을 맛보는 것은 ‘힐링 루틴’이 되었다. 핑크색 네 잎 클로버와 초록색 간판의 다방 안으로 들어간 이들을 반기는 것은 쌍화차, 전병, 수정과, 인절미 등 추억의 먹거리로 가득한 메뉴다. 고심 끝에 달걀노른자가 들어간 쌍화차와 인절미, 모나카(일본 화과자 일종)와 우유를 고른 이들의 귀에 익숙한 노랫말이 들려온다.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달디단 밤양갱 밤양갱이야(…)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과연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일까. 최근 할매니얼 트렌드가 다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할매니얼 트렌드는 지난해 여름 시작했다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가수 비비가 부른 ‘밤양갱’ 음원의 인기와 맞물리면서 다시 부상하고 있다. ‘할매니얼’은 할매 입맛과 밀레니얼 세대를 합친 신조어다. 뉴트로 열풍이 문화 전반을 압도한 가운데 ‘건강’을 찾는 젊은 층이 크게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실제로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SNS에서 ‘#양갱’을 검색하면 할매니얼 관련 게시물이 14만 개 넘게 검색된다. 소시지·햄·떡볶이 등 자극적인 ‘단짠’ 음식을 즐기는 입맛을 ‘초딩 입맛’, 국밥·해장국 등 시원하고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취향을 ‘아재 입맛’이라고 한다면 할매니얼 입맛은 밋밋하지만 건강한 맛이 특징이다. 흑임자·쑥·단호박·순두부 등 부드러운 질감과 자극적이지 않은 맛, 몸에 좋다고 알려진 할머니의 ‘최애’ 식재료를 활용한 제품들이 밀레니얼 세대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식혜부터 꽈배기까지 K-디저트 천국이 된 시장과 편의점
최근에는 K-디저트의 인기도 한몫하고 있다. 글로벌에서 한식의 인기가 높아지며 우리의 제철 식재료인 쑥 등을 이용한 메뉴가 대거 등장했다. 전통 과자인 약과, 금율정과, 개성주악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2월 북촌 입구에 문을 연 떡 전문카페 ‘자이소’는 하루 평균 1,000개가 넘는 찹쌀떡을 판매한다. 주말이면 북촌을 찾는 시민뿐 아니라 한국적인 주전부리를 찾는 외국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커피 맛집으로 유명한 광장시장의 ‘일호상회’는 서양식 디저트 일색이던 메뉴에 얼마 전 약과를 포함시켰다. 단숨에 인기메뉴로 등극한 약과의 주 소비층은 놀랍게도 약과와 별 접점이 없을 것 같은 MZ세대였다. 약과 외에도 식혜부터 꽈배기, 동전빵, 보리쑥떡까지 다양한 옛 음식을 만날 수 있는 전통시장은 K-디저트 천국이다.
광장시장에서 만난 미국인 마크 씨 가족은 꽈배기와 동전빵 등을 사 먹으며 즐거워했다. “K-드라마와 K-무비를 통해 K-디저트를 접했습니다. 실제로 와서 보니 종류가 훨씬 더 다양해서 고르는 재미가 있네요. 미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습니다.” 외국인의 주문이 늘자 아예 ‘Place to Order(주문하는 곳)’라는 영문 안내판을 내건 상점도 생겨났다. K-디저트의 인기는 매출이 말해준다. 최근 배달 플랫폼 요기요가 공개한 지난 2년간의 시즌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K-디저트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약과는 봄 시즌 주문 수가 전년 동기 대비 11배나 증가했다. 예전부터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던 꽈배기도 2.3배 증가했다. ‘어른 음료’로 불리는 쑥 음료도 주문 수가 40% 늘었다.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카페들이 아예 ‘K-디저트 카페’를 테마로 메뉴를 구성해 사랑받는 경우도 있다. 강남역 근처 ‘평화다방’의 쌍화차·인절미꼬치·백설기 롤·옛날 떡꼬치, 인사동에 위치한 ‘담장옆에국화꽃(CCOT)’의 홍시빙수·팥바빙수·수정과 우유·통단팥죽, 을지로에 있는 ‘적당’의 백설기 앙버터·양갱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 여기! 옛 감성 찾아가는 명소
청량리전통시장
전국에서 모여든 ‘보따리상’을 원조로 하는 전통시장. 오랜 전통과 다양한 먹거리를 마주하고 싶다면 청량리전통시장으로 향할 것.
위치 동대문구 청량리동 821
동묘벼룩시장
동관왕묘를 중심으로 펼쳐진 구제 시장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 할매니얼과 그랜파 코어 룩으로 가득하며, 이곳의 명물 토스트는 여전히 1,000원이다.
위치 종로구 숭인동 102-8
쑥띵
맛있는 쑥 디저트 메뉴로 SNS에서 유명해진 카페. 한 입 크기의 ‘쑥 사브레 쿠키’, 약과와 조청이 들어간 ‘쑥약과 피낭시에’는 이곳만의 별미!
위치 광진구 능동로 137 1층
만나당
왕밤약식부터 약과, 궁중 두텁떡 등 추억의 한과를 만날 수 있는 궁중 병과 전문점. 팥소가 가득 든 두텁떡을 먹다 보면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위치 강남구 논현로175길 61
‘할매 간식’의 유행은 ‘할배 패션’의 유행을 부르고
옛날 먹거리가 유행하고 이 유행이 다시 ‘올드머니 룩(자산이 많은 상류층이 입는 옷, 즉 재벌 스타일 또는 금수저 스타일을 일컫는다)’ 트렌드와 결합하면서 일명 ‘할배 패션’도 유행하고 있다. 보풀이 인 니트 카디건을 입고 엉성한 포즈를 취한 수영과 피오의 SNS에는 수만 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할아버지 옷장에서 꺼낸 듯한 스타일을 의미하는 ‘그랜파 코어(Grandpa Core) 룩’은 올봄 패션 트렌드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 옷장에서 볼 법한 옷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인데, 이를 따라 하는 MZ세대가 많아지면서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TV에는 그랜파 코어 룩으로 무장한 스타들이 등장하고, 거리에는 고전적 느낌의 케이블 스웨터나 한물간 오버핏의 옥스퍼드 셔츠·베스트·로퍼 등으로 스타일링한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황금주 중앙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장기화된 고금리·고물가와 경제 불황에 따라 복고가 유행하면서 2030 세대가 이런상품을 힙한 것,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매’와 ‘할배’의 인기 이유를 분석한다. 김태연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는 “사람들은 현재 처한 상황이 힘겨울 때 예전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복고풍을 찾는 소비 심리를 분석한다. 이런 심리가 대중문화와 패션 같은 특정 제품의 소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세계적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전 세계적으로 복고풍 소비가 늘어나기도 했다. 즉 1990년대생들이 성인이 되어 맞닥뜨린 팍팍한 현실이 할매니얼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간식과 할아버지가 즐겨 입으시던 옷이 어딘지 포근한 느낌과 인간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는 해석도 있다. 해석이야 어떻든 세대별 ‘단절’이 화두인 요즘, 할머니·할아버지와 손자·손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식문화의 유행은 참 반가운 일이다.
MINI INTERVIEW
“찹쌀떡~!’ 골목을 가득 채우던 그 소리를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즐겨 찾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그 장면을 접했을 20~30대도 많이 찾고요.
주말 고객의 절반은 외국인입니다.
K-디저트를 좋아하는 취향만큼은 세대 차이, 문화 차이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인기 많은 K-드라마와 K-무비를 통해서만 접하던 전통시장을 경험하기 위해 광장시장을 찾았습니다.
다양한 먹거리가 눈과 입을 즐겁게 해줘서 좋아요.
떡·붕어빵 등은 꽤 오랜 역사가 있는 음식이라는데, 한국의 정서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인 입맛에도 아주 잘 맞습니다.”
글 임지영 사진 정선우, 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