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부권엔 좋은 시장이 많다. 인구도 많고, 1960년대 이후 이주해 서울을 새로운 주거지로 삼은 ‘신(新) 서울인’이 대거 모여 사는 까닭에 전통시장의 정서가 충만하다. 특히 총신대입구역에서 신림동, 봉천동으로 이어지는 권역의 시장은 고객 유입 수로 보나 겉보기에도 상권이 활발하고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사계절 내내 끊이지 않는 발길
이달에는 남성사계시장에 들렀다. 원래 이곳은 남성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60년대에 서울 도심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청계천 지역에서 이주민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자연스레 시장이 커졌다. 원래 있던 시장은 1980년대에 재개발로 철거되었고, 현재의 골목시장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남성사계시장은 문자 그대로 사계절 손님이 넘친다. 사방에 주택 지역이 몰려 있어서 인구가 많고, 또 경쟁할 만한 대형 마트도 적어서 손님이 더 몰린다. 사계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의 이름을 붙인 길을 갖고 있다. 시장이 대개 비슷하지만, 특히 이 시장은 장노년층 손님이 많다. 시장 입구에 큰 약국이 두 곳 있고, 길 건너까지 정형외과·재활의학과 등 노년층 환자 수요가 큰 각종 병의원이 많다. 시장 안쪽에도 병원이 개원하는 등 노년층 손님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풍경이 점점 바뀌고 있다.
신선한 제품이 가득한 시장
나는 종종 이곳에 국밥을 먹으러 들르기도 하고, 특히 여러 신선한 재료를 사러 많이 간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이곳의 신선식품은 서울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만큼 품질이 좋다. 손님들의 손이 크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이곳 상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상인들 중에 젊은 층이 늘어나는 것도 고무적이다. 시장을 무대로 새로운 세대로 변해가는 상인의 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취재에서는 과일전, 채소전, 생선전, 고기전을 유심히 보았다. 과일전에 죽향 같은 고급 품종의 딸기가 선보이고 있는 것도 남성사계시장의 특징이다. 생선전은 어지간한 어촌 현지 시장 풍경을 닮았다. 싱싱한 굴이 통영·고흥·서해안 등 산지별로 진열되어 있는데, 얼마나 선도가 좋은지 윤기가 반질반질하다. 원래 이 시장의 생선전은 마치 난전처럼 ‘막 퍼 담아주는’ 느낌으로 팔기도 한다. 그만큼 손님의 수가 많아서 박리다매하는 상인들이 신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채소전에는 냉이·달래 등 하우스에서 갓 나온 신선하고 계절 향이 풍부한 나물들이 있고, 바다에서 온 물미역·다시마·매생이 같은 해조류도 넘쳐난다. 해조류를 주로 채소전에서 파는 것도 특징이다. 고기전은 최근에 한우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늘었다. 1만 원짜리 한 장에 국거리와 찜거리 한우를 포장해서 파는 등 마케팅이 활발하다.
상인들의 독특한 아이디어 미식
뭐니 뭐니 해도 시장에선 장보기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소위 인스타그램 성지로 통하는 떡집에서는 앙버떡, 백설기, 사색 인절미를 팔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우리말에 딱 들어맞는다. 막걸리 한잔과 함께 푸짐한 돼지 곱창을 즐길 수 있는 집도 있다. 매콤한 양념에 부드러운 곱창이 일품이다. 요즘 시장은 과거에 ‘앉아서 먹던’ 음식을 거리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테이크아웃으로 개발하는 게 붐이다. 새로운 세대의 유행에 맞기도 하고 간편하면서 가게에 앉아 먹을 때 보다 판매량을 늘릴 수 있어서 전통시장 상인들의 아이디어가 속출한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걸로 알았던 떡갈비를 테이크아웃으로 먹을 수 있는 가게도 있다. 떡갈비는 육즙이 풍부하고 워낙 장사가 잘되어 회전율이 좋은지 겉이 촉촉하다.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다.
따뜻한 음식으로 나는 맛있는 겨울
전통시장에서 사 먹는 길거리 음식으로는 역시 어묵꼬치가 으뜸이다. 특히 요즘처럼 혹한이 이어질 때는 뜨거운 국물을 곁들여 꼬치 한두 개로 속을 풀어본다. 이 시장은 빨간 어묵이 인기 있다. 떡볶이와 함께 색깔부터 매운 어묵으로 화끈하게 속을 데웠다.
시장에서 사온 싱싱한 오징어로 집에 와서 국을 끓였다. 얼마나 선도가 좋은지 내장까지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늘 내장까지 먹을 수 있는 오징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냉이된장국에 달래무침도 한 접시 마련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시장의 존재만으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나오는 가장 최상의 먹거리가 고급부터 대중적인 것까지 골고루 있기 때문이다. 남성사계시장 만세다.
봄·여름·가을·겨울, 항상 찾고 싶은 남성사계시장 맛집
매콤한 소스가 듬뿍 ‘사당동빨간오뎅’
남성사계시장의 봄길 초입에서부터 모락모락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발길을 잡는 ‘사당동빨간오뎅’은 손을 멈출 수 없는 ‘빨간 맛’으로 무장한 곳이다. 빨간 국물에 푹 담겨 간이 잘 밴 어묵꼬치는 한번 맛보면 어느새 다음 꼬치를 집게 된다. 여기에 쫄깃한 쌀떡볶이와 떡볶이 소스에 찍어 먹으면 찰떡궁합인 김말이튀김까지 더하면 추운 날 속까지 얼큰하게 데울 수 있다.
가격 어묵꼬치 1,000원 / 김말이튀김 2,000원(3개) / 떡볶이 4,000원
그때 그 시절의 정겨움 ‘옛날집’
마치 포장마차를 연상케 하는 외관의 ‘옛날집’은 내부는 소박해도 인심은 넉넉해 이름처럼 정겹고 푸근한 인상을 준다. 남성사계시장에서 50년간 자리를 지킨 옛날집은 착한 가격에 푸짐한 양으로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선한 야채와 함께 볶아내는 야채곱창은 야들야들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고, 텁텁함 없이 진한 양념은 절로 ‘볶음밥 추가’를 외치게 한다.
가격 야채곱창·순대곱창 1만2,000원 / 막창 1만3,000원 / 제육볶음·오징어볶음 1만2,000원
노릇노릇 무르익은 맛 ‘개성오향한방족발’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주먹만큼 두툼한 떡갈비가 지글지글 철판 위에서 익어간다. 먹음직스러운 떡갈비는 청양고추가 들어간 매운맛과 버섯이 들어간 순한 맛 두 가지 중에 고를 수 있다. 적은 인원이 먹기에 부담 없는 양으로 판매하는 족발과 닭발, 입맛대로 골라 담을 수 있는 다양한 속 재료의 오동통한 핫바도 떡갈비와 함께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가격 닭발·족발(소) 1만 원 / 떡갈비 5,000원(3개)·1만 원(7개) / 핫바 1,500원
남녀노소 사로잡은 떡집 ‘정애맛담’
한차례 불었던 ‘앙버터(팥앙금+버터)’ 열풍을 떡집도 이어받았다. 남성사계시장의 여름길에 위치한 ‘정애맛담’의 ‘앙버떡’은 팥앙금과 버터를 넣어 만든 백설기로, 떡 본연의 맛과 트렌디함을 모두 잡은 인기 상품이다. 이 외에도 오밀조밀한 모양에 색색깔 고운 빛을 띤 떡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는데, 맛과 정성이 모두 담겨 선물용으로 구입하기에도 제격이다.
가격 앙버떡 4,000원 / 사색 인절미 6,000원 / 호박인절미 2,000원
글 박찬일 취재 조서현 사진 김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