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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차가운 빙수

뜨거운 여름, 차가운 빙수>
2020.07

여행

취향의 발견

박찬일의 미식 이야기

뜨거운 여름, 차가운 빙수

빙수와 냉면의 왕좌 게임

몇 년 전, 한 유명한 빙수집에 찾아갔다가 꼬박 2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빙수는 만들기도 빠르고 먹는 것도 빠른데, 그리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줄이 얼마나 길었는지 설명해준다. 그 빙수집은 백화점 한 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대기하는 줄이 그 넓은 백화점 내부를 거의 가득 채우다시피 했다. 나는 동행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점포가 영업하는 데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백화점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천만에. 이걸 먹으러 손님이 워낙 많이 와서 다른 매출도 함께 오르니까 더 좋아하지 않을까.”

빙수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속속 ‘명문집’이 생기고, 인터넷이며 TV에 등장한 때를 대략 10여 년 앞뒤로 보면 될 듯하다. 빙수를 전면에 내세운 프랜차이즈점도 생겼다. 여름 음식의 투톱으로 빙수와 냉면이 각광받기 시작한 셈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유행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시작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여러 기록이 증명한다. 어쨌든 서울은 냉면과 빙수의 도시가 된 지 오래다.

남녀노소 열광하는 얼음과자

내가 자라던 1970~1980년대에도 이미 여름의 왕은 빙수였다. 전문점이라기보다 구멍가게나 제과점에서 여름 계절 음식으로 팔았다. 특히 제과점이 주력하는 메뉴여서 제과점에서 빙수를 시켜놓고 먹는 장면은 여름의 일상이었다. 빙수는 단 음식이어서 제과점에서 만들어 팔기 쉬웠다. 캔에 든 열대 과일을 사용하는 방식도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생과일을 넣는 방식은 1990년대 이후에 유행했다.

역사를 조금 더 뒤로 끌고 가보자. 빙수는 일제강점기에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대개 일본에서 도입한 장비를 사용했다. 이 장비는 1800년대 후반에 요코하마의 한 상인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프랑스의 에펠탑 모양을 모방한 빙삭기가 출현하고, 이것이 이른바 한일 양국의 ‘클래식 빙수 기계’의 원형이 되었다. 이 빙삭기를 ‘회전 빙조기’라고 불렀다. 손잡이를 돌리면 금속 이빨에 물려 있는 얼음덩어리가 빙빙 돌면서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빙수는 이미 그 시기에 서울에서 큰 히트를 치고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에 포목점이 곳곳에 개업을 하고… 무명 가게는 나막신 가게로 바뀌고, 모시 가게 자리에는 빙수점이 열렸다….”(1900년 9월 4일 자 <황성신문>)

또 1915년 무렵의 신문에는 서울(경성)에만 빙수점이 442개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원래 얼음과자는 궁에서 먹는 별난 음식이었다가 1900년대 들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이 장사를 많이 했다. 간단히 기계 하나만 설치하면 기술이 없어도 얼마든지 장사가 잘되었다. 빙수와 냉차는 일제강점기 초기 서울의 최대 히트작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1899~1931년)은 빙수 마니아였다. ‘빙수’라는 제목의 수필을 쓰기도 했다. 수필은 <별건곤> 1929년 8월호에 실렸다.

“찬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얼음덩이를 물 젖은 행주에 싸쥐는 것만 보아도 냉수에 두 발을 담근 것처럼 시원하지만, 써억써억 소리를 내면서 눈발 같은 어름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의 땀쯤은 사라진다.”

이 대목은 빙수 얼음을 가는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빙수의 모양과 맛을 묘사한 대목도 있다.

“얼음발이 굵어서 싸래기를 혀에 대는 것 같아서는 못 쓴다. 겨울에 함박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혓바닥 위에 받는 것같이 고와야 한다. 뚝 떠서 혀에 놓으면 아무것도 놓이는 것이 없이 서늘한 기운만, 달콤한 맛만 혀 속으로 숨어들어서 전기 통하듯이 가슴으로, 배로, 등덜미로 쫙 퍼져가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이름난 작가 이하윤도 한 신문에 이런 수필을 썼다. 방정환이 얼마나 빙수를 좋아했으면 ‘빙수당’이라는 평가가 있었을까 싶다.

“소파가 빙수당(氷水黨)으로 명성이 높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느 기회에 정식으로 시합을 걸어볼 작정이었으나 그는 빙수 흔한 세상을 남겨놓고 마침내 고인이 되고 말았다.”

“써억써억 소리를 내면서 눈발 같은 어름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의 땀쯤은 사라진다.”
방정환, ‘빙수’ 中(<별건곤> 1929년 8월호 게재)

빙수, 새로운 유행을 만들다

팥빙수는 당시 시원한 여름 음식의 대명사였다. 1970년대 들어 경제가 성장하고,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의 간식을 직접 만들어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빵이나 케이크, 도넛 등을 만들었는데, 여름에는 수박화채는 물론 빙수를 만들어보는 주부도 있었다. 점차 백화점 등에 가정용 빙수 기계가 출시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언론 매체는 이런 유행에 발맞춰 빙수 기계 구매처를 소개하고, 팥 쑤는 법을 알려주었다. 팥빙수를 많이 파는 전문점으로 이대 앞 유명한 제과점 겸 분식점이던 ‘가미’를 취재하기도 했다.

“…단팥 만들기도 간단합니다. 팥이 다섯 되면 설탕을 작은 공기로 8개 붓고 3~4시간쯤 푹 삶습니다. 충분히 삶아야 서로 엉기면서 단맛이 나요.” 1975년부터 오로지 이 방법으로 단팥을 만들어왔다는 ‘가미’식 비법이다.

전 세계적으로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이른바 ‘블록버스터’ 영화의 효시라고 할 <죠스>를 상영한 스카라극장은 이런 광고 문구를 내세웠다.

“지독한 암상어가 귀하의 여름을 팥빙수로 만들기 위해 온다.”(1979년 여름)

이미 1980년대에 호텔에서 여름 행사로 빙수를 팔았지만,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특히 모호텔에서 망고를 넣은 빙수를 엄청 비싼 가격으로 선보여서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다른 호텔도 고급 빙수 개발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 온갖 희한한 빙수가 속속 나왔다. 한편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지를 여행하는 사람이 늘고, 현지에서 맛본 빙수를 한국에서 재현해 파는 빙수 가게도 생겨났다. 일본의 ‘가키코오리’나 대만식 열대 과일 빙수, 홍콩식 빙수 등도 나왔다. 이제 서울은 다시 빙수로 한여름을 보낼 모양이다. 올해는 어떤 빙수가 새로 나올까 궁금하다.

고운 얼음 위에 단팥을 소복하게 올린 팥빙수.

박찬일

박찬일
1966년 서울 출생.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의 책을 쓰며 ‘글 잘 쓰는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울이 사랑하는 음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내 널리 알리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취향대로 즐기는 여름 빙수

빙수의 변신은 무죄 !
#별난빙수 TMI

#건강한빙수 #눈꽃빙수

‘부’암동에서 판매하는 ‘빙’수라는 의미로 가게 이름을 ‘부빙’이라고 지었다. 간단명료해 뇌리에 콕 박히는 이름이다. 맛은? 마음이 쿵 내려앉게 하는 맛이다. 탑처럼 높이 쌓은 우유빙수 위에 흑임자 시럽을 아낌없이 뿌려 고소한 향이 풍기는 것은 물론, 국내산 팥과 직접 빚은 떡을 사용해 건강을 챙기는 듯하다. 딸기, 쑥, 완두콩, 옥수수, 골드키위, 하귤 등 다양한 메뉴가 매력이다.

부빙

  • 가격 흑임자빙수 1만5000원, 딸기빙수 1만6000원
  • 주소 종로구 창의문로 136
  • 시간 오후 1시~9시(월·화요일 휴무)
  • 전화 02-394-8288
#비타민C충전

고즈넉한 한옥의 멋이 골목마다 생생한 익선동에 자리한 이 집의 시그너처 빙수는 자몽빙수다. 우유를 얼려 만든 우유 얼음 위에 신선한 생자몽을 듬뿍 올린 후 오렌지로 마무리해 보기만 해도 상큼하다. 빙수 한 그릇에 커다란 자몽이 2개 이상 들어간다고 하니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 C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올여름에는 생망고빙수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오얏꽃

  • 가격 자몽빙수 2만1000원
  • 주소 종로구 돈화문로11다길 15
  • 시간 오전 11시~오후 11시
  • 전화 02-762-8233

박찬일 취재 김시웅, 이내경 사진 한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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