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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나의 서울

아름다움은 재미있다
2020.02

타향에 매료되다

나는 20대 중반까지 제주도를 해외로 떠날 여력이 되지 않는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으로 많이 찾는 섬 정도로 알았다. 돌하르방의 코를 움켜잡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신혼부부의 이미지 속에서 보이는 제주도는 어렴풋이 이국적 정취를 풍겼지만 끌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던 제주도가 순식간에 가보고 싶은 섬으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는 사진작가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라는 책 때문이다. 제주도의 자연을 담는 데 인생의 전부를 헌신한 사진가 개인의 생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지만, 그렇게 사진으로 담아낸 제주도의 풍경은 내가 그동안 보아온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의 경이로움이었다.
‘제주도에 가면 정말 나도 볼 수 있을까, 책에 실린 이런 자연을…?’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 한 권 들고 갤러리 ‘두모악’을 찾아가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제주라는 섬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리고 제주국제공항에 내리던 날, 언젠가는 이 섬에 사는 사람이 꼭 되리라고 조용히, 비장하게 결심했다.
“제주도는 어디가 좋았어?” 하고 누가 묻는다면 당장이라도 공항에서부터 구구절절 예찬을 시작할 수 있다. 나를 홀린 첫 번째 제주도의 이미지가 공항 로비 유리벽 너머로 보이던 야자수들이었으니까. 제주국제공항은 나의 사랑과 모험이 바야흐로 시작되던 곳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은 무모한 몸으로 공항 유리문을 씩씩하게 걸어 나갈 때 나를 통과하던 극적인 빛, ‘이번엔 어디로 가볼래? 이 섬은 아주 크고, 넌 어디든 갈 수 있단다’라고 속삭이며 눈앞에서 오가던 여러 대의 버스들, 동네 이름이 주는 어감만 믿고 덥석 버스에 올라타 쏘다녔던 시간들. 그리고 2016년, 서울에 살면서 매년 혼자 제주를 찾던 방향은 마침내 반대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종종 서울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먼 길 돌아와 거울 앞에 서다

제주도에서 사니 좋지 않느냐, 그토록 좋은 제주도에 있다가 스케줄 때문에 서울에 오려면 정말 귀찮고 싫겠다, 나도 너처럼 제주도에 살고 싶다…. 지난 4년 동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몇명이나 만나왔는지. 서울에 올라와 사람들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부러운 마음부터 내 앞에 왈칵 쏟아낸다. 이 삭막한, 이 매캐한, 이 획일한 도시 서울에 사는 것을 한탄스러워하면서 말이다.
“제가 제주도에 살면 살수록 드는 생각은… 서울이 정말 아름답다는 거예요.”
제주도에서 산 지 3년쯤 지날 무렵부터 나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사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어쭙잖게 달래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는 서울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해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을 나는 이제 김포국제공항에서 느낀다. 서울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서울 사람들은 농담도 잘한다는 듯이 웃는다. 서울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내가 좁은 골목길이나 정신없는 네온사인을 보면서, 혹은 친구인 듯 똑같이 검은색 롱 패딩을 입고 앞서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을 가리키며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할 때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버스 안에서 스쳐 지나는 광화문을 물끄러미 볼 때, 한강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탈 때, 합정역 계단을 총총총 내려가며 달콤한 만주 냄새를 맡을 때, 연희동 길을 걷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한산한 오후에 내가 좋아하는 작은 극장을 향하는 그늘진 골목이나 꽉 막힌 강변북로 위에서 동시에 켜지는 가로등을 볼 때 이 도시는 정말 아름답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나의 서울

이것은 그저 낯섦이 유발하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30년 넘게 살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지루하게만 여겼던 도시가 이제 조금 낯설어졌다고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도 그렇게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감격할 만큼 서울은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서울이 실제로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아니다. 나는 서울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에게 주목하고 있다.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서른네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간단하게 뭉뚱그려진 사실 하나가 조금씩 섬세하게 분열되고 또렷하면서 분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꼬깃꼬깃 구겨서 버린 영수증을 다시 주워 구겨진 주름을 하나하나 펴는 기분이 든다. 멀고 수려한 섬에서 몇 년 살고 나서야 서울에서 내내 살았던 내 지난 삶을, 이 아무것도 아닌 시절을 ‘아름답다’는 감정 안에서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이토록 재미있다.

요조
글 쓰고, 노래하고, 제주에서 책방 ‘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서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서울의 참 매력을 제주를 오가며 새삼 다시 발견하고 있다.
도서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요조의 세상에 이런 책이>를 진행하고 있다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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