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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골목 책방에서 겨울을 보내는 일

기획 · 나의 서울

골목 책방에서 겨울을 보내는 일
2019.12

책과의 첫 번째 인연

2000년대 초반, 나는 인터넷 서점의 MD였다. 매일 여산 통신을 통해 들어오는 산더미 같은 신간을 들춰보며 책 가격과 저자, 출판사, ISBN 코드 등을 직접 기입하고 책 소개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데이터베이스조차 없던 인터넷 서점의 첫 출발을 함께한 셈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해서 막연하지만 늘 서점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런데 수백만 종의 책을 다루는 서점에서 일하다 보 니 나만의 책방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책의 종류에 압도돼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 결국 베스트 셀러 코너에 머무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숨어 있는 좋은 책에 마음이 갔다. 북 큐레이션의 중요성 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었다.

서점을 낸다면 그곳이 약국처럼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속의 문장을 약 대신 처방해주는 동네 약방처럼 말 이다. 이를테면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슬픔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겐 <혼자 책 읽는 시간>이나 <너의 그림자를 읽다>처럼 실제로 글쓴이가 겪은 체험을 기술한 책을 처방하고, 김소연이나 함민복의 시를 자기 직전 마시는 따뜻한차처럼 처방하는 것이다. 실연당한 사람에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같은 책을, 스스로 자신을 매력이 없다고 느끼는 여자에겐 <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같은 책을 처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읽을 책을 식전과 식후로 나눠 알려준다거나 혈압약처럼 장복할 필요성이 있는 책도 구분해주고 말이다. 결혼 후 다른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에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처방할 책의 목록에 넣고 싶었다. 그 사람의 증상과 성향, 책에 대한 태도에 따라 <나는 기다립니다> 같은 가벼운 그림책이라든가 <행운에 속지 마라> 같은 나심 탈레브의 경제서를 처방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약사처럼 흰색 가운을 입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심히 그 아픔에 가 닿을 책을, 아니 밑줄을 소화제 처럼 쥐여주고 싶었다.

어떤 시는 삶의 활력과 용기를 준다. 가령 내가 1월 1일이 되면 반복해 읽는 심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같은 시다. 살면서 한 번쯤은 시나 소설 속 좋은 문장이 상처에 연고처럼 스미는 경험을 하면 어떨까. 책은 어렵다는 편견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친구는 많았다. 하지만 ‘책 처방 서점’이라는 콘셉트는 너무 이상적이라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5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서점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

당신을 위한 사적인 서점

홍대 근처 건물 4층에 자리한 이 작은 ‘사적인 서점’은 사람들에게 적확한 책을 처방하기 위해 사전 질문지를 받고 예약제로만 운영된다. 1시간 동안 상담을 한 후 책을 처방하는 이 세심한 운영법을 고안한 서점 주인이 너무 궁금해서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의 게스트로 초대한 적도 있다. 주인에게 책방 운영의 힘듦과 보람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 도서정가제 이후, 그러니까 3~4년 전부터 골목에 동네 책방이 생겨나고 있다.

사라졌던 동네 빵집이 소리 소문 없이 부활해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책방의 불빛이 켜지고 있다. 그렇게 혜화동에 시집만 파는 시집 전문 서점이 생겼고, 서촌에 역사서와 국내서만 파는 책방이 생겼으며, 삼청동에 과학 서점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이 생겼다. 서점 주인들의 이력도 독특해서 시집 서점의 주인은 시인이고, 역사 책방의 주인은 대기업에 이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과학 서점의 주인은 천체물리학자다.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 덕에 사람들은 그저 책방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북 큐레이션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대형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그 책방만의 베스트셀러를 구경할 수도 있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나 과학서를 좀 더 편안하게 즐기는 방법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다.

골목 책방에서 겨울을 보내는 일

서울의 골목 안 작은 책방들은 그저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일종의 ‘살롱’ 같은 역할도 한다.
독립 출판사들의 지원군이 되기도 하고, 신진 작가들의 낭독 장소가 되기도 한다.

서울에서 찾아낸 작은 책방들

이런 골목 안 책방들은 그저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일종의 ‘살롱’ 같은 역할도 한다. 독립 출판사들의 지원군이 되기도 하고, 신진 작가들의 낭독 장소가 되기도 한다. 혜화동의 ‘위트앤시니컬’에서는 시인의 낭독회가 열리고, 삼청동의 ‘갈다’에서는 과학자들의 다양한 과학 이야기를 접할 수 있으며, 실제 이들이 집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통인동의 ‘역사책방’은 경복궁을 지나치는 BTS의 팬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의외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상암동에 처음 문을 연 1세대 동네 서점 ‘북바이북’에서는 북맥(Book+맥주)이라는 말이 탄생하기도 했고, 해방촌 골목 위에 위치한 문학 전문 서점 ‘고요서사’는 소믈리에와 함께 책에 어울리는 와인을 페어링해 소개하기도 한다. 나만의 서점을 열지는 못했지만, 나는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이라는 EBS TV 프로그램에서 전국의 동네 서점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책방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작고 개성 있는 동네 서점인 ‘서울형책방’ 50개를 선정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서울에서는 많은 책방이 생기고 사라진다. 하지만 상암동의 ‘북바이북’(광화문으로 옮겼다)이나 신촌의 ‘위트앤시 니컬’(혜화동으로 옮겼다)처럼 끝내 위기를 넘기고 위치를 옮기면서까지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성장하는 서점들 도 있다. 영국에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대출해주는 도서관이 있다. 직업별로 사람 책이 분류되어 있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소방관에 관심이 있으면 소방관을 대출하는 식이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도 소설가 섹션에 들어 있을 거다. 하지만 동네 책방에 가면 그 책을 ‘대출’하는 게 아니라 ‘간직’할 수 있다. 서점 ‘버티고’에서 1년 가까이 소설가 은희경이 매달 펼친 낭독회처럼 저자를 주기적으로 만나볼수 있는 다양한 기회도 주어진다.

책방에서 책을 고르다 창밖으로 눈이 날리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오랫동안 눈을 바라보았 다. 거대한 흰색 담요가 서울 곳곳의 지저분한 오물과 쓰레기, 금 가고 낡은 것들을 서서히 덮고 있었다. 세상으로 부터 받은 상처 위에 바르는 하얀 연고처럼 말이다. 나는 심보르스카의 시구를 떠올렸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 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 하리.” 그 하얀 눈이 차가울 테지만, 끝내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백영옥

백영옥
2006년 단편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8년 첫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이 좋아 책과 함께하는 일을 시작하고, 책이 좋아서 작가가 된 그녀는 현재 EBS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에서 골목을 여행하며 동네 책방을 소개하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다.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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