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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나의 서울

커다란 도시와 작디작은 이야기들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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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도시와 작디작은 이야기들



상경한 지 올해로 17년이 되었다. 이제는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나는 도리질을 한다. 적응했다는 것은 익숙해졌음을 뜻한 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편안함 때문에 머물게 만든다. 흔들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마음은 일상을 긍정하는 데 더없이 좋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 앞에서 주저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 나부끼고 싶다.

나는 여행보다 산책을 좋아한다. 여행에서 맞이할 수 있는커다란 활기보다 산책하면서 얻는 소소한 자극을 더 좋아한다. 지역으로 출장 갈 때 꼭 하는 일도 산책이다. 그 지 역을 이해하는 데 산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이 지역은 어떤 산업이 발달했구나, 어떤 음식을 많이 먹는구나, 가로수에 어떤 나무가 많구나….’ 발견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은 산책하기 좋은 도시다. ‘대도시에서 산책을?’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고 모이는 곳에는 늘 걸을 만한 데가 있다. 운동장이나 탁 트인 공원이 아니어도 된다.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만 피하면 발닿을 데는 넘쳐난다. 그래서 나는 서울 어디서든 걸을 궁리를 한다. 자가용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목적지 근처에 내린 다음 걷기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면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켠다. 나는 지독한 길치고,그 때문에 난생처음 가는 곳에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주로 걷는 곳은 큰길이 아니라 골목이다. 골목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비밀한 사연이 있다. 비밀하다고 해서 거창한 내력이나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간을 들여 들여다봐야만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서울이라는 이 커다란 도시 곳곳에는 작디작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책을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직접 거기에 있을 때만 상상력을 자극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상경하고 처음 살던 곳은 신림동 녹두거리였다. 오르막 지형이었고, 집에 가려면 오르막 꼭대기까지 참을성 있게 걸어야 했다. 매일매일 언덕을 오르니 어느 순간 힘에 부치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다. 오르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무엇이 있는지, 여기와 저기는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두 집 건너 하나씩 있는 백반집의 맛이 조금씩 다르듯이 얼핏 같은 것처럼 보여도 살피면 전혀 다른 사연이 있었다.


그 뒤로 몇 번의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주변에 뭐가 있는지 직접 부딪쳐서 알아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줄줄이 나오는 알짜 정보들을 멀리하고 힘들여 발품을 팔았다. 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저 골목으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사당역 근처에 살 때는 사당역에서 이수역까지 이어진 큰 길을 뒤로하고 골목골목을 탐색했다. 돌아가더라도 결국에는 도착한다는 믿음도 생겼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 사이 나는 많은 것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일수록 허름한 골목에 멋들어진 상점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골목 덕분에 나는 서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남동과 익선동의 골목을 누빌 때는 야누스가 떠올랐다.

내가 주로 걷는 곳은 큰길이 아니라 골목이다. 골목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비밀한 사연이 있다. 비밀하다고 해서 거창한 내력이나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간을 들여들여다봐야만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서울이라는 이 커다란 도시 곳곳에는 작디작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서울골목

대도시의 화려함과 일상의 누추함이 섞여드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환호하는 사람 뒤에 서서 묵묵히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기 위해 걷기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골목을 두리번거리면서 매끈한 글도 좋지만 도중에 자갈이 있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최근 길눈이 어두운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무시무시한 미세먼지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도 어느 순간 눈과 코가 뻑뻑한 느낌이 든다. ‘미세먼지 나쁨’ 신호를 ‘최악은 아니네’라고 받아치는 여유도 생겼다. 서울에 골목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새로운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한다. 걸어야 흔들리고, 흔들려야 기울어진다. 몸과 마음이 기울어지는 장면에서 글을 쓸 단초를 얻는다. 조각난 주춧돌 위에 무엇을 올릴 수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딴생각이 된다. 서울에서 산책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궁리하고 있다. 딴청을, 딴생각을, 백지 위에 펼쳐놓을 무수한 ‘딴’들을.

오은

오은
2002년 등단한 시인이자 산책가.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은사진 장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