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만에 재조명하는 시민 영웅
백범 김구 선생부터 무명의 아무개까지 독립운동은 너나없이 소망하는
한민족의 커다란 움직임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을 안국역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100년 하늘문’으로 명명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를 기점으로 안국역 곳곳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안국역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 이외에도 자주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낸 80여 명의 진정한 시민 영웅을 만날 수 있다 .
독립군의 원동력, 이회영 선생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의 우당 이회영 선생은 한말의 교육가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를 조직했다.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고, 침체된 무장 독립 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톈진 일본 영사관 폭탄 투척 등 의열 투쟁을 지도하다가 상하이 밀정에 의해 투옥되고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 장 독립장을 추서받았고, 2002년 중국 정부가 그에게 ‘항일혁명 열사 증서’를 수여했다.
하늘에서 펼치는 독립운동, 권기옥 열사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 꿈이 있는 나라는 희망이 있다.” 1920년대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보유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한 한 비행사가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은 10년간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대위 계급까지 진급한 최고의 비행사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비행기를 타는 공부를 해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가겠다’는 구국의 다짐으로 비행기에 오른 것. 이후 평안남도 도청 폭파 사건에 가담했고,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남편인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한국전쟁 때는 대한민국을 위해 전선을 누비기도 했다.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 김마리아 선생
“독립을 성취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계몽운동과 구국 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워온 김마리아 선생은 교사가 되어 근대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대에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일본 내 조선인 유학생들이 마련한 2·8 독립선언 대회에 참여했다. 1919년 2월 17일 서울로 돌아온 뒤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이후 중국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과 1920년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을 역임했고, 미국 내 여성 독립운동 단체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해외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그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대 1000의 전투, 김상옥 의사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해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서울시 종로구 종각역 8번 출구 어귀는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가 단독으로 일본 군경 1000명에 맞서 그야말로 전투를 치른 곳이다. 1913년 비밀결사 단체 광복단을, 1920년 암살단을 조직하고 일제 고관 처단 등을 추진하다가 발각돼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의열단에 가입한 후 적극적인 무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앞장섰다.1923년 1월 2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수명의 일본 군경을 사살했으나 탄환이 다하자 마지막 탄환을 머리에 쏘아 자결 순국했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훈했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열사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을 해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열사.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한평생을 바친 그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 속 안옥윤(전지현 분)의 실제 인물로 크게 부각되었다. 남편이 의병 전쟁에 나가 전사하자 그 한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 이후 만주로 망명해 60세에 순국할 때까지 15년 동안 만주에서 의열 투쟁을 펼친 인물이다. 남자현 열사의 독립 투쟁 역사 또한 파란만장하다. 서로 군정서 참가, 1925년 제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주살시도,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에 독립 호소, 1933년 일본의 주만특명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처단 시도로 체포되었고,옥중 단식으로 보석 석방되었으나 순국했다.
백발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같이 3대 독립투사로 꼽히는 강우규 의사는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 정거장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65세 최고령 독립운동가로 기억된다. 아쉽게도 총독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 투쟁으로 정무총감, 육군 소장, 경찰서장 등 일본군 핵심 인물 37명을 사상케 한 굉장히 의미 있는 의거를 거행한 것.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만나 55세의 나이에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65세 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몸으로 시도한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11월 29일 사형당해 순국했다.
Info. 안국역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테마 역으로 지정되었다. 4번 출구를 기점으로 80여 명의 사진이 담긴 100년 기둥과 독립운동가의 업적 및 어록을 기록한 안전문, 헌정 의자 등을 만날 수 있다.
글 김시웅일러스트 한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