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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그락 딱딱, 마작

짜그락 딱딱, 마작>
2018.12

문화

서울 생활사

짜그락 딱딱, 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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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구락부 서울?

한자어 ‘마작(麻雀)’은 패를 섞을 때 “짜그락 딱딱” 하는 소리가 마치 대나무 숲에서
참새 떼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송나라 때 양산박 의적 108명의 화상을 그려서 마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



부유한 가정에서 밤늦도록 마작하는 모습을 그렸다.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

한 끗 차이, 놀이와 노름

인간은 누구인가. 참으로 오래되고 끈덕진 질문이다. 수많 은 정의가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이 없다. 인간의 속성을 알기가 그만큼 힘들다. 인간 가운데에서도 정작 나를 알기가 가장 어렵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명언 가운데 명언이 되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문화 역사학 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인간을 ‘호모 루덴 스’라고 불렀다. 슬기로운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노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란다. 그에 따르면 놀이야말로 인 간의 특징이며, 놀이에서 모든 문화가 태어났다. 놀이는 비 생산적이며 허구적 활동이다. 또 자유면서 창의고, 변덕이 면서 규율이다. 인간은 서로 경쟁하면서 소란스럽게 놀다 가도 곧 규칙을 만들어냈다. 그 규칙에 따라 승패를 가르면 서 놀이가 생겼다. 불안 심리를 해소하려고 놀이가 생겼다 고도 한다. 뭔가 내기를 걸면 더 짜릿했을 것이다. 돈이 위세를 떨치면서 내기에 돈이 걸렸고, 그렇게 도박이 생겨났 다. 요행과 일확천금의 꿈이 어우러지면서 한 끗 차이로 도박이 놀이의 세계를 벗어났다. 

경찰이 마작 도박을 한 사람을 단속했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유지 또는 지식인이었음을 드러내준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19일)

밥상보다 마작상

마작은 중국 청조 초에 궁중에서 은밀히 즐기던 귀족과 왕 족만의 최상급 놀이였다. 19세기 중엽부터 궁중 독점물이 던 마작이 일반 중국인에게 흘러나왔다. 이 마작이 1920년 대 초에 미국에 소개되어 유행하자 일본 상류층이 재빠르 게 배웠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1924년 매일신보가 마작을 국내에 소개 하기 시작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마작은 ‘세계적 유행의 가정 오락품’이다.

서양 지식인이 좋아하는 현대적 오락이며, 규칙이 복잡해 암산 등 두뇌 활동에 도움을 준단다. 또 돈 내기를 하지 않아도 아주 재미있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마작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1926년에 마작이 흘러들어왔다. 1927년 소설가 김동인이 ‘마작대왕’으로 세상에 알려지는가 싶더니, “마작을 모르면 사교계에 나설 수 없다”고 할 만큼 마작이 무섭게 퍼졌 다. 조그만 사랑채라도 있는 집이면 마작 도구를 들여놓지 않은 집이 없는 지경이라고 한탄하는 글도 있다. 마작 틀은 조선에서 만들 수 없어서 중국에서 수입했다. 마작 도구 한 벌에 15원이 넘었다. 그때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 월급 이 40원 남짓이었으니 꽤 큰돈이다. “집집마다 밥상보다 마 작상을 더 챙겼다”는 말이 그럴싸하다.

‘도박의 도시’ 서울 거리거리에 마작 구락부 간판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음식점이나 회사도 아예 마작 용어로 상호를 바꾸라고 풍자한 만화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

초저녁 당구, 늦은 밤 마작

초저녁에는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를 하다가 밤이 이슥해지 면 마작 도박을 하는 꾼들이 있었다. ‘옥돌장(玉突場)’이라 고 부른 당구장은 192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구 와 마작이라는 ‘현대적 놀이’가 도박과 만났다. 왜 그들은 도박을 했을까. 어떤 이의 회고에 따르면 괴로움을 잊고 위 안을 얻으려고 그랬단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울한 식민 지 조선은 더할 나위 없는 도박의 텃밭이었다. 누가 보아도 마작집을 차리면 큰돈이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했다. ‘마작 구락부’ 따위의 이름을 붙인 마작집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을 일본식 한자로 쓴 말이다. 1929년에는 관에서 마작집을 공식으로 허가했다. 그 뒤로 ‘공인 도박 마작집’이 곳곳에 생겼다. 1932년에는 130개나 되었다. 처음 마작 구락부는 동호인끼리 취미로 놀이를 하 는 곳이었다. “마작은 스포츠다”라고 할 만큼 분위기가 좋 았다. 그러나 곧 마작집은 공인 도박장이 되었다. 그곳에는 ‘마작 전문업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패를 짜서 온갖 협잡을 했다.

일제는 때때로 마작 도박을 단속하는 시늉을 했지만 마작 구락부에는 너그러웠다. 인력거꾼 1전 내기 투전은 용서 없 이 붙잡으면서 마작 구락부는 모른 체했다. 왜 그랬을까. 그 무렵 어느 분석가는 “지식인과 젊은이를 마작에 빠뜨려 현실도피의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일제의 속셈이 다”라고 주장했다. 설득력이 있다. 마작 구락부의 문을 닫 게 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제는 전시체 제를 강화하고 일상을 통제했다. 마침내 1940년 모든 마작 구락부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피서지를 돌아다니며 큰판 을 벌이는 마작 도박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도박은 매혹적인 마법이고 가려움증이며 사지를 마비시키 는 병’이다. 불안과 우울, 일확천금의 환상이 그 병의 원인 이다. 잘 놀아야 풍요로운 인생이다. 노는 꼴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니, 그야말로 철들게 놀아야 한다. 병들 지 말고 놀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제2의 아편’ 마작 중독 (동아일보, 1931년 1월 13일)

최규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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